웃음이 묻어나는 편지 - MBC 예술단 엮음
셋 - 사랑으로 풀어내는 웃음보따리
남편의 애국심 - 김연주(여, 서울시 서초구 방배동)
제 남편은 지독한 축구 팬입니다. 축구 경기하는 날, 특히나 국가대표가 축구 경기를 하는 날이면 그놈의 별난 징크스가 발동하기 시작한답니다. 축구가 있는 며칠 전부터는 그 좋아하는 술을 한 잔도 하지 않고, 당일날 아침에는 목욕재계를 합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경기 당일날 TV옆에 태극기까지 매달려고 하는 것을 제가 극구 말렸지 뭡니까. 그것까지는 좋습니다. 문제는 시합이 시작되면서부터입니다. 남편은 자기가 무슨 감독이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2시간이나 되는 경기 시간 내내 서 구경을 합니다. 전반전이 끝나 진짜 감독과 코치, 선수들이 다 앉아서 쉬는데도, 남편은 무슨 통뼈라고 꼿꼿이 서서 "흠, 흠." 하면서 후반전 작전 구상을 하는 겁니다. 앉으면 안된대요. 그렇게 해야 이긴다나요? 그런데 제일 큰 문제는 화장실엔 가지 않는 겁니다. 남편은 원래 방광이 약해서 1시간이 멀다 하고 화장실엘 자주 가는데, 축구 경기 때문 이를 악물고 참는 겁니다. 자신이 소변을 보게 되면 한국이 진다는 겁니다.
안중근 의사같이 조국을 위해서 목숨까지 바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 정도를 못 참느냐는 식입니다. 조국을 향한 남편의 일편단심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어떨 때는 도저히 참을 수 없게 되면 " 으-윽."하는 신음 소리를 내고, 바람난 수캐마냥 방안을 정신없이 왔다갔다 하고, 이마에는 왕방울만한 땀방울이 맺히고, 눈에는 실핏줄이 돋아나면서도 장렬하게 참는 겁니다. 조국을 위해서 말입니다. 그 모습은 마치 전쟁 영화에서 어느 병사가 조국을 위해 사우다가 총탄에 맞아 장렬히 전사하기 직전의 모습과도 같습니다. 경기가 막상막하일 경우 남편은 소변을 더욱 참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그러나 남편은 한 번도 조국을 배반하지 않았습니다. 도저히 자신의 의지로서는 감당할 수 없어서 찔끔찔끔 소변이 나오면, 조국을 향한 자신의 연약함을 그리도 안타까워했습니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박빙이던 경기에서 한국이 한 골을 넣자, 저와 남편은 소리를 지르고 만세를 부르다가 그만 제가 남편의 배를 손으로 치게 되었습니다. 남편은 갑자기 "으악!" 소리를 지르며 화장실로 뛰어가더니 '쏴아!' 그 바람에 홍수가 나버렸습니다. 저는 깔깔대고 웃으면서 말했죠.
"여보, 빨리 아랫 런닝구(팬티) 갈아입어요. 다 큰 어른이 소금 얻어 올 수는 없잖아요?"
그러자 남편은 심각한 얼굴이 되었습니다.
"뭔소리고, 빤스가 문제가 아이다. 이제 두 꼴은 먹게 생깃다 아이가."
그런데 정말 신기했습니다. 그 후 한국은 순식간에 두 골을 먹어버린 겁니다. 또다시 남편의 애국심을 시험하는 날이 다가왔습니다. 저는 콧소리를 섞어가며 남편을 꼬드겼습니다.
"여보, 축구 볼 때 당신은 징크스가 있는 것이 아니라, 아예 미신의 수준이에요. 미신! 며칠 전부터 술도 안 먹고 목욕하고 태극기 달아 놓는 것까지는 좋아요. 그런데 제발 내내 서서 구경하지 말고 또 소변만큼은 제발 참지 마세요. 화장실도 자주 가고 편안히 앉아서 과일도 드시면서 시청하세요. 당신이 그렇게 안해도 한국은 충분히 이겨요!"
저는 억지로 눈물까지 보이며 남편을 설득했습니다. 그러자 남편은 한참을 생각하더니 "오야! 그래 한 번 해보자" 하면서 화장실도 자주 가고 편히 앉아서 과일도 먹어가면서 축구 경기를 시청했습니다. 그런데 그날 이후 저는 완전히 죄인이 되어버렸습니다. 육 대 일(6:1), 이란 축구가 한국 축구를 개패듯이 패버린 것이었습니다. 그게 아시아 선수권 경기였던가요? 한 골, 두 골, 세 골... 골이 들어갈 때마다 남편의 눈은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그 풀린 눈으로 원망을 가득 담아서 저를 째려보기 시작했습니다.
"테레비(TV) 껍삐라! 사과 깍아 놓은 거 이거 빨리 안 가지고 가나?"
경기 이후 남편은 넋나간 사람처럼 밤하늘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습니다. 아마 조국에 대한 죄스러운 마음 때문이었나 봅니다. 탕수육, 잡채, 만두... 그날 저녁 저는 밤새도록 술 안주를 만들어 내면서 용서를 빌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너무 억울하잖아요? 저는 또 한 번 그것이 단순한 징크스인 것을 증명하고자 했습니다. 이번엔 저도 비장했습니다. 더 이상 남편의 그 변태적인 징크스를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습니다. '가정을 지키자!' 저는 남편 못지 않게 비장했습니다.
"여보, 이번에도 제 말을 듣고 한국이 지면은 당신이 하라는 대로 다 할게요."
남편은 극구 반대했지만 결국 이브의 유혹에 넘어갔습니다.
"오이야 좋다! 니 이거 잘 알아라. 이제 마지막이다. 알겄나?"
남편은 화장실을 다녀왔습니다. 그런데 그 경기가 무슨 경기였는 줄 아십니까? 세계 청소년 축구선수권, 한국과 브라질의 경기였습니다. 그 결과 잘 아시죠? 십 대 삼(10:3). 저는 그래도 한국이 세 골이나 넣지 않았냐며 선처를 호소했지만 소용없었습니다. 그날 저녁 저는 또다시 상다리가 휘어지도록 마련해 놓고 한 숨도 못 잔채 남편의 설교를 들어야 했습니다.
"니(너) 내보고 미신이라했째? 이게 미신이가? 한국축구가 져도 이리 진 거는 내 몬봤다. 내가 얼굴을 들고 살 수가 없다. 니 또 한 번 축구할때는 잔소리해싸몬 니캉 내캉 딴사람 되는기라. 알겄나?"
이종환, 최유라씨! 이땅에는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숨어서 애국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잘 기억해 주셨으면 합니다. 저는 남편의 애국심을 절반도 따라가지 못하는 못난 아내인가 봅니다. 흐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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