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재미난 사연들을 듣고 있노라니 10년 전쯤에 있었던 어떤 사건 하나가 슬며시 떠올라 몇 자 적어봅니다. 사실 주책스러운 이야기인지라 해야할지 말아야할지 망설였지만 일단 용기를 내봅니다. 결혼 2년째이던 어느 겨울! 딸아이를 고모집에 데려가고 남편과 전 호젓하게 신혼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어이, 우리 오랜만에 기분 쪼까 내보면 어쩌겠는가."
모처럼 자유로워짐에 마음이 동했는지 남편은 입가에 음흉한 미소까지 띠우며 말했습니다.
"아이구, 그게 무슨 소리예요. 해질려면 아직도 멀었는데..."
"이사람아, 해가 무슨 상관인가. 마침 아이도 없는데 잘됐잖아."
싫다며 몇 번 뿌리쳐 봤지만 남편은 이미 실행에 옮기고 있었고, 애라 모르겠다. 해가 있으면 어떻고 달이 있으면 어떠랴! 전 어느새 신문광고에 등장하는 모델만큼이나 분위기 있는 모습으로 변해가고 남편의 눈빛이 핑크빛으로 막 젖어들 찰나였습니다. 낯익은 얼굴 하나가 유리창 너머로 '스윽' 지나가는 게 아니겠습니까.
"아이구메, 고모부 오셨는갑네."
난 용수철처럼 문을 박차고 부엌으로 튕겨져 나왔습니다. 그만큼 잽싸게 튀어나왔다는 거 아닙니까. 그런데 아뿔싸! 급한 나머지 그만 옷도 안 챙겨들고 속옷바람으로 나왔지 뭡니까. 정말 난감하더라구요. 그런데 남편은 자기의 옷매무새만 매만지고 나서 태연하게 문을 여는 겁니다. 마치 '우리 아무짓도 안했어요.' 하는 얼굴로 말입니다.
"아. 이녀석이 글쎄 자꾸만 집에 가자고 떼를 쓰잖나."
고모부는 오신 이유를 설명하시고는 아이를 며칠 데리고 있을까 했더니 아직은 엄마를 찾아서 안되겠더라며 절 찾으시는 겁니다.
"그 사람 가게에 뭐 사러나간 모양입니다."
남편은 스스럼없이 둘러댔습니다. '천연덕스럽기도 하지. 그러나 저러나 빨리 가시면 좋겠는데...' 사실 날씨가 너무너무 춥더라구요. 속옷차람으로 부엌 한켠에 쪼그리고 있자니 우습기도 하고... 하지만 방법이 없으니 어쩝니까. 고모부가 빨리 가시기를 기다릴 수밖에요. 이런저런 얘기가 오가더니 드디어 고모부가 일어설 기미를 보이셨습니다.
"매형, 오랜만에 오셨는데 저녁이라고 들고 가셔야지요."
'어머머머, 저 남자가 미쳤어, 미쳤어!' 그런데 그날따라 고모부께선 "그럼 그럴까." 하시면서 슬그머니 주저 앉으시는 게 아닙니까. 정말 큰일난 겁니다. 아무리 머리를 조아려봐도 대책은 안 떠오르고 부엌문으 왜 그리 삐걱거리는지, 또 바람은 왜 그렇게도 쌩쌩 들어 오는지... 결국 눈물, 콧물이 졸졸 흐르기 시작하고 온몸이 으슬으슬 떨려왔습니다. '어떻게 하든 이 난관을 극복해야 한다.' 이것이 제 인생의 목표인 양 온통 머릿속이 그 생각으로 가득 찼습니다. 순간 궁하면 통한다고 했던가,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했던가, 난 기가 막힌 묘안이 떠올랐습니다. 삐걱거리는 문틈 사이로 밖을 내다보니 옆방 아주머니의 옷들이 빨랫줄에서 '펄럭펄럭' 춤을 추고 있는 겁니다. '그래 바로 저거야.' 살글살금 다가가서 그저 손에 잡히는 대로 옷 한 벌을 걷어가지고 잽싸게 돌아왔습니다. 겨울 날씨라서 그런지 옷은 마르지 않아 눅눅했지만, 찬밥 더운밥 가릴 때입니까. 대충 몸에 걸치고 보니 무슨 푸대자루를 씌워놓은 양 제가 봐도 우습더라구요. 옷주인이 좀 푸짐한 편이셨거든요. 그렇지만 아쉬운 대로 해결을 했으니 고모부께 인사도 드리고 저녁준비도 서둘렸습니다. 그제서야 제 옷이 이불 속에 있음을 안 남편은 혼자 '키득키득' 웃음을 참느라 애를 쓰는 것 같더라구요. 어쩌면 제 모양이 너무 가관이라 우스웠는지도 모르지요. 전 저녁상을 놓기 위해 이불을 치우면서 일부러 옷을 집어들고는 큰소리로 말했습니다.
"옷이 인제 다 말랐네. 겨울에 빨래가 너무 안 말라서 탈이야." 그런 내막을 전혀 알 리 없는 고모부께선 그 날 저녁을 맛있게 들고 돌아가셨습니다. 한데 사건이 거기서 끝이 났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고모부를 배웅하고 나서 대문을 막 들어서는데 그만 옷주인과 떡 마주쳐 버리고 만 것입니다. 등에서 식은땀이 '주르르' 흘러내리더라구요.
"어디서 많이 보던 옷이다."
아주머니는 아리송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습니다.
"저어-아줌마. 죄-죄송해요."
"근디 어째서 새댁이 그 옷을 입고 있당가?"
전 아차하면 옷도둑으로 몰리겠다 싶어 창피를 무릅쓰고 자초지종을 설명했습니다. 사실은 이러구저러구 저러구이러구 해서... 한참 설명을 들으신 아주머니는 박장대소를 하더니 말했습니다.
"아따 근디 왜 하필 그 옷이당가? 다른 옷도 많은디. 그 옷은 우리 똘이 이불로 깔아줬던 옷이랑께. 내가 살이 쪄분께 안 맞어불잖어. 그려도 버리긴 아깝제잉-. 근디 생각해본께 우리 똘이 자리로 깔아주믄 좋겠다 싶드라고 허지만 걱정은 하지 마소. 내가 겁나게 깨끗이 빨이 부렸응께."
이종환, 최유라씨!
그때의 제 기분은 굳이 설명 안 드려도 아시겠지요? 똘이는 그 집 강아지 이름이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