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음이 묻어나는 편지 - MBC 예술단 엮음
셋 - 사랑으로 풀어내는 웃음보따리
뒷집의 빠른 놈(?) - 윤일형(남. 광주광역시 서구 광천동)
'천사의 말이라도 사랑이 없으면 한낱 꽹가리 소리에 지나지 않고, 그다지 향기롭지 못한 덩(?) 이야기라도 예술적으로 승화되면 함박꽃보다 더 환한 웃음꽃으로 핀다.' 물론 덩(?)이 예술적으로 승화될지는 미지수지만 최선을 다하려고 합니다. 지금으로부터 5년 전, 직원이 고작 스무 명 남짓한 조그마한 회사에 디니고 있을 때에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일하시는 분들은 대부분 아주머니들이었지만 그 와중에도 총각이 하나 있었으니 봉고차 기사인 바로 나. 또한 거기엔 아가씨까지 하나 있었으니 경리 일을 보는 문제의 그녀. 그녀는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습니다. 춘향이와 잘 아는 사이이거나 아니면 양귀비를 하녀로 부리는 사람인 줄로 알았으니까요. 저 또한 미남 그 자체였구요. 물론 남들은 한사코 인정하지 않지만. 아가씨 하나에 총각 하나. 무언가 역사가 이루어질 것같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그녀의 콧대는 그 미모만큼이나 도도하고 높았습니다. 그녀에게 제 마음을 전하려 할 때면 그녀는 여지없이 콧방귀로 저의 자존심을 어두운 구석으로 날려 버렸습니다.
그리고 전 이렇듯 매번 구겨지는 자존심을 추스르다 보니 차츰 제 마음도 그녀에게서 멀어지고 오히려 미운 감정만 쌓여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그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기회라고 말하기에는 너무나 우습고 창피하고 또 엉뚱한... 그러나 알고 보니 그 것이 기회였습니다. 이야기에 앞서 저의 두 가지 특이한 버릇이랄까 습성에 대해 소개하고 넘어가겠습니다. 그것은 아무도 못말리는 건망증과 또 술을 많이 마신 다음날이면 어김없이 뒷집(?)에서 빠른 놈(?)을 만난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뒷집은 다 아시리라 믿고 빠른 놈에 대해 잠시 설명드리겠습니다. 본디 '덩'이라는 것이 성질이 제각각이라 무겁고 신중하게 내리 누르는 놈들이 있는 반면, 칼루이스처럼 빠른 속도로 내리 꽂히려는 놈들이 있습니다. 술 마시고 탈 날 때 내려오는 놈들이 바로 빠른 놈들입니다. 운명의 그날 저는 거래처에 다녀오는 길이었습니다. 뱃속에서 시냇물 흐르는 소리가 간간이 들리더니 갑자기 엉덩이 쪽에서 빠른 놈이 출발 준비를 끝냈다는 신호가 왔습니다. 등골이 오싹해지면서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아이구야, 이러면 안 되는데. 회사에 도착하려면 아직 멀었는데. 이걸 어째. 회사까지 그냥 가? 아니야 이 놈은 보통 놈이 아닌 것 같아. 중간에 적당한 데 들러서 해결하는게 좋겠어. 이건 인간으로서 참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야. 어디 보자. 저 건물에는 화장실이 있겠다. 옳지, 여기다 주차해 놓고 으으- 차에서 내리는 것은 일단 성공. 이거 걷는 것도 어렵네. 그렇다면 팽귄같이 살살 걸어가 볼까. 혹시 문이라도 잠겨 있으면 안되는데. 어디 보자.
어라 잠겼네.
우리나라 이거 문제 있어. 살다보면 나처럼 급한 일이 있을 수도 있는데 이렇게 잠가 놓으면 어떻게 하란 말이야. 다른 데로 가 보자. 저 건물은 왠지 안 잠겨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어... 옳지, 여기는 안 잠겼군. 화장실 같아 보이지? 계단! 계단은 한 손으로 난간을 꽉 붙잡고 하체 쪽은 힘을 빼고 이러-케. 한 칸 성공. 또오 한 칸. 또오오 한 칸. 또오오오... 휴-. 땀이 비오듯 쏟아지누만. 세상에 계단에서 사우나 한다는 건 보다 듣다 처음이네. 이제 마지막 계단이지! 화장실이 바로 저긴데 예서 멈출 수 있나, 마지마악- 한 칸.
다 올라왔어. 삐그덕 문을 열고...
'아이쿠 이런 하느님 맙소사. 창고잖아.'
아아! 더 이상은 못 참겠다. 미칠 것 같아. 이 일을 어쩐다. 기왕 들어왔으니 한층 더 올라가? 아니야. 계단은 빠른 놈에게 아주 치명적이야. 내려가는 게 좋겠어.
후- 후- 후-
이제 내려가는 것도 만만치가 않네. 오- 빠른 놈이여. 아니 빠른 님이여, 빠른 분이시여, 세상 구경이 그렇게도 하고 싶으시나이까? 제발 조금만 참아 주소서. 아이고 하느님 저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 저는 천천히 운전해야 했습니다. 차가 갑자기 덜컹거리면 빠른 놈이 주인도 모르는 사이에 난감한 사건을 터트릴지 모르거든요. 가까스로 회사에 도착한 저는 화장실 앞에까지 차를 몰고 갔습니다. 뒷집 들어가 앉자마자 시동도 걸지 않았는데 오토바이가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조금만 힘을 줘도 오토바이는 쌩쌩 달렸고 기분은 날아갈 것처럼 좋았습니다. 그러나 행복도 잠시-. 오토바이를 다 타고 나서 정신을 차리고 보니 화장지를 들고 오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우째 이런 일이. 뭘로 해결한다. 그래 재활용이라는 게 있지. 어디 쓸만한 것이... 짜식들 좀 여유있게 쓰지 이게 뭐야. 순간 기가 막힌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아침에 옆칸에 들렀을 때 프로 야구 해태 타이거즈의 김 아무개 선수가 방망이를 들고 환하게 웃는 사진이 실린 스포츠 신문이 생각났던겁니다. '그래 바로 그거야!' 사방은 조용했습니다. 일이 아직은 완전히 끝난 상태가 아니었으므로 엉거주춤한 자세로 옆 칸으로 갔습니다. 김 아무개 선수는 여전히 환하게 웃고 있었습니다. '음, 그런대로 쓸만 하겠어.' 신문을 집어들고 다시 처음에 일보던 칸으로 돌아서는 순간! 아뿔사, 이게 웬일인가! 그녀가 정면으로 들이닥친 것이었습니다. 순간 그녀는 이게 무슨 일인가 멍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더니 이윽고 비명을 지르며 달아났습니다.
"으아악-."
으이구. 이게 뭣 놈의 댄스(Dance)여. 엉거주춤도 무슨 춤이라고 추고 있는 것이여, 시방. 그때 제가 왜 처음 일보던 칸으로 돌아가려 했을까요? 까닭모를 일종의 동물적 회귀 본능이거나 아니면 제 것에 대한 본능적 애착일까요? 한마디로 정신없는 놈의 정신없는 짓이었습니다. 그후 그녀는 저를 보면 피식피식 웃거나, 무언가 못 볼 것까지 보았다는 듯 얼굴을 붉히거나, 혹은 손가락을 머리 근처에서 빙빙 돌려가며 미친놈 아니냐는 시늉을 하기도 했습니다. 일이 이것으로 끝났으면 저만 창피당하고 끝났을 일이지만 또 한번의 엉뚱한 사건이 저에게 기회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신은 저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날도 역시 거래처에 다녀오는 길이었습니다. 다시는 그런 수모를 당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던 저였기에 전날 회식자리에서 조금은 술을 자제했습니다. 그래도 주거니 받거니 했던 술이 과했던 탓인지 자꾸 엉덩이 쪽으로 신호가 왔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지난번처럼 무지막지한 놈은 아니었습니다. 차가 덜컹거리지 않도록 조심하는 정도에서 회사에 도착하는 데 성공했으니까요. 화장지도 잘 챙겼구요. 예전 같지 않게 정신도 말짱했죠. 전 천천히 화장실로 걸어 들어가 노크를 했습니다.
"똑, 똑."
"네, 들어오세요."
그녀의 목소리였습니다. 저는 아주 당당히 문을 열었습니다. 또 정신이 나간 겁니다. 그녀는 예전보다 눈이 더 둥그래지더군요. 그래도 저는 아무 생각없이 그녀 앞에 아주 태연히 서 있었습니다. 그제서야 그녀가 발딱 일어서 문을 쾅 닫았죠. 쾅 소리를 듣고 나서야 실성한 사람처럼 비실비실 웃음을 흘리며 옆칸으로 갔습니다.
'오! 주여 감사합니다.'
저는 그 문을 열어보기 전까지는 여자 엉덩이가 조그만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생각과는 다르게 엄청 뚱뚱했습니다. 옆칸으로 들어간 저는 실실 웃어가며 오토바이를 사정없이 몰았습니다. 오토바이의 요란한 폭발음을 내며 예전보다 더 신나게 달렸습니다. 그런데-! 옆칸에서 그녀가 저보다 더 크고 요란한 속도로 오토바이를 모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고상하고 도도하고 콧대 높은 여자가 오토바이를 저렇게 인정사정 없이 몰다니.'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푸하하하하하하."
저의 웃음은 그칠 줄 몰랐습니다.
"푸하하하하하하-."
한참 웃고 있는데 옆칸에서 그녀가 빽하니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만 해요"
"그만 하라니까요."
"자꾸 웃음이 나오는 걸 어떡해요."
"창피하게시리 그만 해요."
"좋아, 그만 하는 대신 나하고 커피 한 잔 마실 수 있지요?"
"알았어요."
"영화도 같이 볼 수 있지요?"
"야! 이 야만인아."
"내 입은 그렇게 무거운 편이 못 되는데요?"
"좋아, 알았어요."
"드라이브는?"
"알았다니까요."
우리는 뒷집에서 서로에게 많은 공통점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제가 화장지 챙기는 걸 잊어버리듯, 그녀도 급하면 문고리 잠그는 걸 잊어버리는 건 물론이거니와 아무데서나 사무실로 착각해서 '네, 들어오세요.'라고 말하는 건망증이 닮았고, 또 과음한 다음날이면 둘 다 오토바이를 탄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후 우리는 아주 좋은(?)사이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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