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음이 묻어나는 편지 - MBC 예술단 엮음
셋 - 사랑으로 풀어내는 웃음보따리
강변가요제여 영원하라!
지금부터 10년 전, MBC 강변가요제가 열리던 여름이었습니다. 우짜든지 그녀와 단둘만의 여행을 호시탐탐 꿈꾸어 오던 저는 대학 가요제와는 달리 서울에서 직접 예선이 열리는 강변가요제를 의도적으로 노렸습니다. 이리저리 짜집기한 노래를 한 곡 만든 다음, 그녀한테 명가수로서의 포부까지 큰소리 뻥뻥 쳤습니다. 악보까지 본 그녀는 '강변가요제'라는 미명에 훌러덩 속아 서울행에 순순히 응했습니다. 예심이 있던 날, 저는 그녀의 묘한 기대를 십분 악용해 장닭이 암탉 꼬시듯 한껏 목청을 돋우어 불러제끼긴 했지만, 사실 저에게 있어 가요제는 물건너 보낸 지 오래고, 오로지 그녀와의 추억만들기에만 눈탱이 벌겋게 현안이었습니다. 저는 그야말로 '폼생폼사' 있는 폼 없는 폼 혼자 다 잡아가며 홀가분하게 한 곡조 뽑고는 기타 들쳐메고 예심장을 물러났습니다. 정동 라디오 극장을 나온 우리는 한쌍의 장닭, 암탉처럼 덕수궁 돌담길을 거닐었습니다. 그런데 암탉의 불길한 한마디!
"덕수궁 돌담길을 애인끼리 걸으마, 그 사랑이 깨진다카던데 들어봤으예?"
"그기 무신 쓸데없는 소리고! 그거이 다 애인없는 놈들이 만들어낸 헛소리잉기라. 만약에 진짜로 그렇다카마, 지금까지 이 돌담이 이래 성하겠나? 벌써 뚜껑이 열린 놈들한테 박살나고도 남았지. 안 그렇나?"
그녀의 난데없는 위협에 큰소리로 입막음은 우선 했지만, 속으로 뜨끔했던 저로서는 그녀의 흔들리는 사랑에다 쐐기 말뚝 아니 그 무엇이라도 박아두어야겠다는 의지를 굳히기에 이르렀습니다. 덕수궁을 둘러본 우리는 뭔가 사랑의 흔적을 남기기로 합의했고, 유치한 줄도 모르고 영혼 합체의 의미랍시고 각자 머리카락 세 올씩을 뽑았습니다. 그리고는 보다 완전한 합체를 위해 머리카락의 주인을 확실히 밝혀 두고자 했고, 그래서 무식하고도 과감하게 주민등록증에서 사진을 떼냈습니다. 위대한 대한민국의 국적마저도 사랑에 쓸개빠진 저를 말리지는 못했습니다. 각하께 송구스러울 뿐이었습니다. 한낱 사랑을 위해 나라를 배반하는 순간이었습니다. 넋나간 저는 그렇다 쳐도 그 여자! 여인의 몸으로 주민등록증을 찢어내는 그녀야말로 영심이도 애심이도 아닌, 바로 흑심 품은 연필 부인이었습니다. 여하튼 이 보물단지의 영구 보관을 위해 저는 타임캡슐을 본떠 알루미늄으로 된 담배 속종이로 주민등록증의 사진과 머리카락을 단단히 싸서는 덕수궁 어느 문설주 사이에다 꼭 끼워두었습니다. 말초신경의 감각과 소뇌(잔머리)의 직감으로 무르익은 분위기를 탐지한 저는 춘천을 거쳐서 집으로 돌아가자고 꼬셨고, 그녀도 좋다고 했습니다. 하늘도 귀신도 이미 제 편이었습니다.
소양강 땜에 도착한 저는 이제 2단계로 뱃놀이를 제안했고, 마침내 양구행 배를 타는 데 성공했습니다. 본디 한 마리 슬픈 늑대였던 저로서는 우짜든지 깊숙한 골짜기로 그녀를 유인해야만 했으니까요. 하기사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녀가 쳐둔 그물에 오히려 제가 걸려든것 같은 느낌도 들지만, 어쨌든 기분은 입을 째고도 남음이 있었습니다. 뱃전에 부딪히는 파도, 물보라를 일으키며 달려가는 쾌속선, 그림같은 주변의 풍광, 우리는 분위기에 흠뻑 취해 서로 손을 꼬옥 잡고 끈끈한 눈빛을 주고 받았습니다. 마치 소양강 강바닥을 자유로이 노니는 한쌍의 빠가사리 같은 느낌이었다고나 할까요? 어느덧 배는 양구 선착장에 닿았습니다. 우리는 내리자마자 경찰의 검문을 받았는데, 군사지역이라 외지인에 대한 의례적인 검문 같았습니다. 태어나 지금까지 부모님께 책값 삥땅친 것 말고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는 저는 당당하게 신분증을 보였습니다. 그런데 신분증을 받아든 경찰 아저씨의 인상이 완전히 썩은 배추벌레 씹은 표정이 되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그 사진! 덕수궁에다 가출 신고하고 온 놈이 붙어 있을 리 만무였고, 앙꼬없는 찐빵이야 미운 놈 준다지만, 사진 없는 주민등록증을 엇다 쓰겠습니까? 아저씨는 그녀한테도 신분증을 보자고 했고, 역시 주인공이 도망가고 없는 그녀의 주민등록증을 본 아저씨의 얼굴빛이 하얗게 질리면서 별안간 외치면서 다짜고짜 허리에 차고 있던 권총을 뽑아들었습니다.
"너거들 혹시 간첩 아니가?"
아찔한 순간이었습니다. 까딱하다간 총각 딱지도 못 떼고 염라대왕 맏사위 될 형편이었습니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반사적으로 두 손을 번쩍 들었습니다. 이어 아저씨는 제 어깨에 멘 기타를 낚어채더니 기타 통속을 샅샅이 훑었고, 찔찔 짜고 있는 그녀가 처년지 아줌만지는 안중에도 없는듯 그녀의 소지품까지 하나하나 검사를 했습니다. 기대와는 달리 난수표나 독침이 나오질 않자, 아저씨는 월척 놓친 표정으로 경찰서로 가 신분을 확인해야겠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졸지에 간첩으로 몰려 한쌍의 도살장 끌려가는 암수소처럼 끌려갔습니다.
결국 자초지종을 다 듣고 신분까지 확인하고서야 아저씨는 인상을 폈습니다. 하지만 아저씨는 "장난칠 게 없어서 하필 주민등록증으로 장난이가 응? 국가 공문서 훼손에다 위조 미수까지 죄가 얼마나 큰 줄알기는 아나? 자슥들아." 우리를 나무랐고, 반공 정신교육을 철저히 받고서야 우리는 겨우 간첩에서 다시 선량한 민간인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밖은 이미 캄캄했고 억수 같은 비마저 내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솔 담배 5갑을 사서 귀찮게 해서 죄송했다며 아저씨께 드렸습니다. 그러자 소금 먹은 놈이 물쓴다고 아저씨는 한결 부드러운 목소리로 양구는 군사지역이라 신분증 없이는 숙박하기가 어려울 거라며, 뜻밖에도 직접 여관까지 순찰차로 데려다 주는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그녀와 첫차도 막차도 아닌 순찰차를 타고 둘만의 공간으로 달려가는 기분, 두 분께야 고비사막 낙타 방귀 소리쯤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제게 있어서는 호강에 빠져 요강에 헤엄치는, 바로 그 기분이었습니다. 우리 시대 마지막 철부지 간첩에 대한 융숭한 대접이었다고나 할까요? 순찰차 안에서 저는 내심 아저씨께 뽀뽀라도 해 드리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심각한 표정으로 내내 한숨만 푹푹 내쉬며 위장전술을 폈고, 간첩으로까지 몰렸던 그녀 또한 권총 찬 아저씨 앞에서는 차마 찍 소리 못하고 도살장으로 끌려가고 있었습니다. 그 아저씨는 저로 봐서는 눈물이 쏙 빠지도록 고맙게도 방까지 잡아주고서야 돌아갔습니다. 실랑이 하나없이 정체(늑대)마저 숨긴 채 합법적으로 그녀를 납치하는 혁혁한 전과였습니다. 그야말로 공권력의 힘은 위대했습니다. 두고 온 덕수궁과 주인 없는 주민등록증이 저를 감격케 했습니다. '아, MBC 강변가요제여 영원하라!' 그렇게 낯선 곳 양구, 경남장 여관의 여름밤은 깊어만 갔습니다.
아침에 눈을 떠보니 저의 4반세기 짧은 인생은 기쁨과 환희의 새 장을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칼날처럼 도도하던 그녀는 온데간데없고, 저의 의관을 말끔히 정제해 놓고, 박카스까지 대령한 자세로 그녀는 서방님의 기침을 기다리고 있었으니까요. 두 분께서야 수박 껍데기 핥는 맛이겠지만, 강변가요제와 공권력의 승리가 가져다 준 한 여름밤의 깊은 사연을 아쉽지만 여기까지만 밝혀둡니다. 원주 역전에서 저는 강변가요제 탈락의 비보를 접했지만 결코 슬프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저는 아득한 심원의 뿌리로부터 뭔지모를 뿌듯함이 용솟음침을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이미 제 곁에는 강변가요제가 가져다 준 평생의 선물이 찰싹 달라붙어 있었으니까요.
추신: 5년뒤, 우린 한쌍의 토끼가 되어 결혼했고, 지금은 토끼 같은 딸래미 하나 두고서 그런대로 잘살고 있습니다. 덕수궁에 끼워 둔 머리카락과 사진이 잘 있는지 문득 궁금해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