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음이 묻어나는 편지 - MBC 예술단 엮음
둘 - 생활속에 피어나는 웃음안개
가스배달부는 벨을 두 번 울린다
저는 태어날 때부터 성격이 순하고 내성적이어서 라디오 방송들을 듣기만 할 뿐 이렇게 편지를 쓴다는 건 상상조차 해본 일이 없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직업상 국민 여러분들, 특히 가, 나, 다로 시작되는 아파트에 살고 계신 분들께 당부드리고 싶은 말이 있어서 용기를 냈습니다. 제가 직업상이라고 말씀드렸는데 저는 L.P.G 가스를 배달하는 사람입니다. 다 아시죠? 떡 벌어진 어깨, 약간 낡은 청바지에 검은색 선글라스를 쓰고 뒤에는 가스를 가득 실은 채 1톤 트럭을 운전하는 가스배달부. 무전기 옆에 차고 도심을 가르는 거친 사나이만의 직업. 저는 정말 이 직업이 멋지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모든 직업에는 애로사항이 있기 마련.... 멋지게만 보이는 이 가스배달에도 몇 가지 애로사항이 있답니다. 이제부터 제가 하는 얘기를 귀담아 들으시고 특히 가, 나, 다동에 사시는 아파트 주민 여러분 앞으로 적극 협조 바랍니다. 며칠 전, 가스를 가득 싣고 시내를 질주하는 저에게 본부로부터 무전기로 긴급명령이 떨어졌습니다. 그것은 다름아닌 XX아파트 가동 506호에 지금 밥짓다 가스가 떨어졌으니 밥이 죽되기 전에 빨리 가스를 갖다 주라는 거였습니다. 긴급명령을 하달받은 저는 고객의 밥이 죽이 되선 안된다는 프로정신과 가스배달부의 자존심을 걸고 문제의 XX아파트로 출동. 제가 1분이라도 늦으면 죽도 밥도 안된다는 생각에 출동 4분 만에 XX아파트 가동 앞에 도착한 저는 차를 세우고 문을 열어 땅에 발을 디뎠습니다. '음, 제시간에 도착했군.'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 가스 1통(약44Kg)을 어깨에 멘 저는 과감히 아파트 현관을 넘어섰습니다. 하지만 막상 5층까지 이걸 메고 올라가려니 눈앞이 캄캄해지더군요.(L.P.G를 사용하는 건물은 대부분 엘리베이터가 없음) 그러나 제가 누굽니까? 프로정신이 투철한 대한민국 가스배달의 자존심이 아닙니까?
1층? 가볍게 올라갔습니다.
2층? 약간 힘들데요.
3층? 힘을 냈습니다.
4층? 오기로 올라갔죠.
그리고 마지막 5층! 드디어 정상에 도착했다라는 승리의 미소가 저의 입술을 스쳤습니다.
"딩- 동."
"누구세요?"
맑은 아가씨의 음성. 아-음,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습니다.
"가스 왔습니다."
그런데 당연히 문을 열고 반갑게 맞아 주어야 할 아가씨는 문을 꼭 걸어잠그고 이렇게 말하더군요.
"저희 가스 안 시켰는데요."
이 무슨 마른 하늘에 장작빠개지는 소린가? 어떻게 올라온 5층인데.... 오직 정신력 하나로 버티고 올라온 5층을 그렇게 쉽게 안 시켰다고 말할 수 있단 말입니까? 저는 제가 잘못 왔나 하고 옆집 대문을 봤습니다. 가동 505호. 그렇다면 여긴 분명 가동 506호가 맞을텐데.... 다시 한번 벨을 눌렀지만 아가씬지 아줌만지는 얼굴도 비치지 않았고, 저는 비틀비틀 다시 내려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를 겨우 진정시키며 허리의 무전기를 꺼내 본부에 확인을 했습니다.
"본부 나와라 오바."
"말하라 오바."
"XX아파트 가동 506호 맞나?"
"잠기 기다리기 바란다. 오바."
"알았다."
"가동이 아니라 다동인 것 같다 오바."
"다시 한번 말해봐라."
"미안하다. 가동이 아니고 다동이다. 오바."
미안하다? 아니 이 일이 미안하다고 해결될 일입니까? 가와 다의 발음이 비슷한 건 누구한테 하소연해야 합니까? 그렇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아직도 날 기다리고 있을 다동 506호야 조금만 기다려라. 내가 간다.' 아직 후들거리는 다리로 엑셀을 밟고 다동에 도착하니 이미 10여 분의 시간이 지나 있었고, 다동 5층의 하늘은 멀기만 하더군요. 그대로 쓰러지고 싶었지만 제가 누굽니까? 프로정신과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대한민국의 가스배달부 아닙니까? 올라갔죠. 올라가야죠. 다시 어깨에 멧습니다. 벌써 통증이 오더군요.
1층? 힘을 냈습니다.
2층? 정신력을 버텼죠.
3층? 오기로 올라섰습니다.
4층? 깡으로 올라갔습니다.
드디어, 드디어 5층? 그대로 주저앉아 대문을 두드렸습니다. 아주 많이 늙으신 할머니가 나오시더군요.
"가스 불렸죠?"
할머니는 땀을 뻘뻘 흘리며 앉아있는 저와 그 옆에 세워진 가스통을 번갈아 보시더니 이러시는 거예요.
"가스 불르긴 불렀는디, 우리는 아저씨들 힘들께비 가스통을 현관 옆 화단에 놨는디, 그 무거운 것을 뭣헌다고 예까지 떼미고 온데요?"
그리고 결정적인 할머니의 한마디!
"그나저나 아자씨가 늦게 오는 바람에 밥이 다 죽됐는디 어터켜-어?"
저의 투철한 프로정신과 가스배달의 자존심은 이 한마디에 완전히 날아가 버렸고, 저는 그걸 메고 다시 내려와 제가 차를 세워 놓았던 바로 옆 나무 뒤에 설치된 가스통을 교체해 주었답니다. 국민 여러분! 가, 나, 다동으로 시작되는 아파트 주민여러분! 가스 주문하실 때에 발음을 정확히 해 주십시오. 저, 집에서 가끔 쌍코피가 터집니다. 하루에 한두 개도 아니고 몇십 개씩 날라야 하는데, 제발 발음 좀 정확히 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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