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음이 묻어나는 편지 - MBC 예술단 엮음
둘 - 생활속에 피어나는 웃음안개
굳세어라 큰 바위 - 이민호(남.대구 달서구 성당동)
얼마 전, 이종환씨가 1등 못했다고 자살한 학생이 있고, 뚱뚱하다고 자살한 학생이 한둘이 아니라며 걱정스런 말씀을 방송에 하는 걸 듣고, '아니, 나도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데 이런 일들이....' 하는 생각에 제 얘기를 편지로 보내야겠다 결심했습니다. 저희 집은 대대로 아들이 귀한 집으로 제가 4대 독자가 될 뻔했는데, 제 어머니의 예상을 뒤집는 눈부신 활약으로 3형제를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그런데 어릴 적 저희 집에 손님이 오시면 꼭 빠뜨리지 않는 것이 머리이야기였습니다. 3형제의 머리가 특이하기 때문이었지요.. 하지만 이 유별난 머리는 집안 내력입니다. 먼저 저희 아버지께서는 태어나자마자 동네사람들이 "드디어 이씨집안에 장군 났네. 장군 났어. 대갈 장군 났네." 할 정도로 동네를 떠들썩하게 하셨고, 저희 어머니 역시 아기 때 두돌 지나고부터는 뒤통수만 보고는 애인지 어른인지 분간을 못했답니다. 아! 이 두 분의 운명적 만남 끝에 짜잔! 저를 낳았으니 드디어 일은 벌어졌겠지요. 3대 독자가 낳은 아들, 이씨 문중에 4대 독자인 저를 할머니께서 처음 보셨을 때 얼마나 기뻐했겠습니까. 그런데 통곡을 하시면서 첫마디가 "에이고... 뭐 저런 기 다 인노, 저거 인간 안된다." 그럴 만도 한 게 그때 저의 모습은 눈을 기준으로 위로는 머리, 아래로는 하체였다 나요. 산파가 놀라서 빨리 큰 병원으로 옮겨야 하다고 법석을 떨었던 그날 그렇게 세상을 놀래면서 저는 세상에 나왔습니다. 자라면서 별의별 소리를 다 들었습니다. 특히 학교에 다니면서부터 수업시간마다 제 머리와 관련된 얘기들이 끝이 없었습니다. 국어를 공부하면 '큰 바위 얼굴 소설'이 나와 웃음거리가 되고, 수학을 공부하면 '가분수'가 나와서 시선 집중을 시키고, 사회를 공부하면 무슨 무슨 사건이 '대두'되고 있다며 떠들어대니 공부가 제대로 됐겠습니까? 모두 잊고 TV를 보니 '모여라 꿈 동산'이 괴롭히고 특히 무엇보다도 성질나는 일은 제 머리 절반만한 연예인들이 나와서는 머리가 크다고 불평하고 웃고 떠드는 걸 보면 TV를 확 부숴버리고 싶었습니다.
이렇게 10여 년 애들에게 놀림 받더니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는 두발검사를 왜 그리 자주 하는지 박박 밀어도 머리가 커서 멀리서 보면 텁수룩하게 보였던 거지요.
"너 머리 깎어. 머리 깎고 오란 말야, 알겠어!"
1주일이 멀다 하고 이발소를 들락거렸고, 친구들이랑 당구 치다가 학생 주임선생님께서 들이닥쳐 쪽문으로 도망 갈 때 맨 먼저 나가려다 벽 모퉁이에 부딪히며 나자빠지는 바람에 친구들까지 다 잡혔을 때는 정말 죽고 싶었습니다. 그 다음주 수업에 들어오신 그 학생주임선생님은,
"니 머리 때문에 그 날은 수확이 컸다."고 하시며 놀리셨고, 어쩌다 수업시간에 조는 학생이 있으면, "야! 저기 봐. 민호도 저 큰 머리 쳐들고 공부하는데 조는 놈들은 뭐야?"하시며 조는 애들을 웃음으로 몰았었죠. 그러나 이런 저의 고민을 아는지 모르는지 야간 자습을 마치고 집으로 들어가면 어머니께선 제 얼굴을 만지시며 말하셨죠. "아이고, 우리 아들 공부한다꼬 얼굴이 고마 반쪽이 되삣네. 우짜꼬." 하시며 속을 확 뒤집어 놓으시기 일쑤였습니다. 걱정하시는 어머니 앞에서 대들 수는 없고 방에 들어와 이불을 뒤집어쓰고 저는 속으로 고함을 질러댔습니다. '엄니, 내 얼굴이 아무리 반쪽이라캐도 다른 애들 두 배다 두배! 흑흑흑.' 대학에 와서는 병역의 의무를 감당하기 위해 신체검사를 받았는데 의외로 저는 시력 때문에 방위병 판정을 받았습니다. 그 사실을 친구들에게 알리자 모두 의심을 하며 저의 머리만 보는 게 아니겠습니까?
"니가 방위병 판정을 받은 건, 니 시력 때문이 아니고, 머리 때문아이가? 니가 전방에 배치되면 완벽한 적의 표적이 되기 때문에 국방부가 니를 살린 기다."
또 다른 녀석은 이렇게도 말하더군요.
"그래. 맞다. 니 머리에 맞는 철모가 어디 있겠나. 푸하하."
아, 그러는 게 아니겠습니까? 게다가 교양과목을 드으러 강의실에 들어가도 여기저기서 수군거리더군요.
"저 학생은 머리가 커서 면제래."
"입대했다가 철모가 안 맞아서 쫓겨났대."
그래도 남학생들은 농담으로 여겨 웃으며 넘기는데 정작 여학생들은 심각하게 받아들이며 어쩌다 저를 만나면 진짜인 줄 알고 저마다 위로를 하는데 정말 난감하더라 구요.
"사실 머리가 아니고 시력 때문이야."
하며 몇 번이나 말하고 돌아다녔지만 결국 제가 맘속에 찍어두었던 저만의 연인, 귀여운 저의 천사의 귀에도 그 소리가 들어갔을 땐 그 날로 그 여학생을 포기했고 또 한번 죽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집에서 가족끼리 모여 머리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더 가관입니다. 하지만 머리 큰 게 나쁜 것만도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됐습니다. 제 바로 밑의 동생은 머리가 커서 덕 본 게 한두 번이 아니라나요. 무면허일 때 운전면허를 따러 시험장에 50cc오토바이를 타고 가는데 200m앞에서 의경들이 단속을 벌이고 있었답니다. 자동차 사이로 숨어가 봐야 큰머리 들킬 것 뻔하니 아예 1차선으로 달려보자, 어쩌면 자동차만 단속할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밀어붙였는데 의경 하나가 1차선으로 뛰어들어 세우더라는 겁니다.
"아저씨! 1차선으로 막 달리면 우짭니꺼. 면허증 좀 보입시더. 어 이 아저씨 헐멧도 안 썼네."
동생은 시험시간은 다가오는데 사정을 말할 수도 없고, 다소곳하게 말했답니다.
"제가 보시다시피 머리가 좀 커서 헬멧 쓰기에는 많이 불편합니다. 어떻게 사정 좀 봐주시면 안되겠습니까?"
사정을 하고 빌어도 봤지만 의경의 마음은 좀처럼 돌아서지 않자 갑자기 머리 때문에 놀림당한 기억이 살아나서 헬멧을 던져주며 소릴 질렀답니다.
"누가 쓰기 싫어 안 쓰는 교? 들어가나 안 들어가나 직접 씌워줘 보소?"
하며 소함을 질러대자 놀란 의경은 뒤로 한 발짝 물러서며 어떻게 할 지 몰라 당황하다가 헬멧을 들고 억지로 씌워 보려고 덤비자 또 엄포를 소리쳤대요.
"씌우는 건 좋은데 다시 벗겨줘야 되구마! 알겠는교?"
더 분노에 찬 절교를 하자,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았는지 슬슬 꼬리를 내리면서 조심해서 가라고 하더가는 말에 얼마나 웃었는지. 한창 외모에 관심이 가는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남들보다 조금 이상하다는 것이 정말 힘들었고 공부에 집중할 수 없을 정도로 스트레스였지만, 조금 더 성숙해진 지금은 행복은 머리 작은 순이 분명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고 진정 가치 있는 인생이 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저와의 비교조차 불가능한 어려운 신체조건과 환경 속에서도 꿋꿋이 그리고 훌륭히 살아가는 많은 분들이 계셔서 오늘의 제가 있듯이 이 부족한 편지가 외모와 성적 때문에 비관하는 청소년들에게 조금이 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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