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음이 묻어나는 편지 - MBC 예술단 엮음
둘 - 생활속에 피어나는 웃음안개
밤새 안녕하셨습니까?
이종환, 최유라씨 안녕하세요! 저는 회사차를 운전하는 사람으로 '지금은 라디오 시대'의 '준'청취자입니다. '왕'이 아니고 왜 '준'이나구요? 하루 3교대 근무하는데 3시에서 11시까지 근무하는 때밖에 듣지를 못한답니다. 그래도 보름에 한 번씩 5일간은 들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큰 행복입니까. 그래서 말인데 '지금은 라디오 시대' 애청자들을 위하여 뭔가 저도 일익을 해야 한다, 받고만 살 수 있나 주고도 살아야지 하는 사명감에서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 겪은 일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전 그때 그 일로 인하여 사흘 닷새 밤을 엎드려 자야만 했습니다. 사건은 이러했습니다. 문제의 그날, 제 뒤에 앉은 요시찰들, 문제아들, 가방끈 뒷부분을 잡는 애들, 하복 소매가 팔꿈치를 덮는 애들은 점심시간을 풀(full)로 이용하기 위해 도시락은 일찌감치 까먹고 4교시가 끝나자마자 한문으로 아닐 비자 비슷한 모양을 그린 노트를 펴놓고 접어대기 시작했습니다.
"으찌 먹어."
"에이 니네, 걸렸다."
"이번엔 쌈 먹어."
"으라차차 쌈 깠어."
"떨어진 것 넣고 니 먹어."
일명 쌈치기.... 수업시간에도 책상 밑으로 짝궁과 깠니, 못 깠니 하면서 동전을 주고 받는 쌈치기가 그날도 차질없이 벌어진 것입니다. 며칠 전 책값을 타왔다가 고스란히 날려버린 저는 본전이라도 챙기려는 순수한 일념에서 손바닥이 발바닥이 되도록 싹싹 비벼댔고 얼마나 비벼댔는지 엄지 손가락 윗부분은 동전의 푸른 때가 운동장 잔디마냥 입혀졌으며, 손톱 사이에는 푸른 녹때가 난초의 연복초를 연상케 하였습니다. 밥먹고 섭취한 HO2량이 많아서 인지 오줌이 심하게 마려웠지만 점심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고 한판이라도 더 집어 복구를 해야 할 이 시점에서 3층을 뛰어 내려가 100미터 더 가야 하는 화장실에 갔다 온다는 건 저에게 사치였습니다. 그러나 운명의 여신은 저에게 미소를 보내지 않았습니다. 제 손에는 동전 몇 개가 남았고, 5교시를 알리는 수업종 소리가 울려버렸습니다. 누가 설상가상이라 했던가, 엎친 데 덮쳤다고 했던가, 참았던 오줌은 봇물처럼 터질 것만 같았고, 선생님은 금방 들어오실 것 같은데 그렇다고 교실 바닥에다 실례할 수는 없고.... '그래 할 수 없다!' 저는 비장한 결단을 내려야만 했습니다. 오늘도 미안하지만 그곳을 이용해 주자. 저는 일층만 올라가면 옥상이고, 그곳에 제 전용 변기통이 있다는 걸 상기시켰습니다. 빗물이 흘러내리게끔 뚫린 구멍으로 젊음의 상징인 제 힘찬 폭포수를 쏟아 부었습니다. 되도록 밖으로 튀지 않게 정조준하여 힘차게 힘차게 구멍 깊숙이.... 오래도 보았지요. 그리고 나서 세 번쯤인가, 털털 상하 운동을 시켜주고 안전지대로 옮긴 저는 개운한 마음으로 옥상을 내려가고 있는데 밑에서 사정없이 동해안 공비소탕 나온 군인은 저리 가라 하고 민첩하면서도 우악스럽게 튀어 올라오는 기술선생님과 수위 아저씨, 테니스를 치다 오시는지 머리에는 물기가 가득하였고, 와이셔츠는 땀에 흠뻑 젖어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걸 느끼는 순간 영문도 모른 채 저는 오뉴월 닭 패대기치듯 계단도 다 내려서기 전에 복지부동하게 되었습니다.
공무원이 복지부동한다는 말은 들었어도 공무원 시험 한 번 본 일이 없는 제가 복지부동하였으니 어쩐 일입니까. 개처럼 질질 훈육실로 끌려간 저는 대걸레 자루로 손가락 발가락을 다 합해도 셀 수 없이 허벌나게 맞으면서 그 이유를 알았지요. 제가 실례한 옥상 그 구멍을 통해 빗물이 흘러내리게끔 달아논 물통의 맨 밑에 것이 떨어져나가 비라도 많이 올라치면 고공에서 떨어지는 물줄기가 사방팔방으로 흙탕물을 튀겼고 바로 옆의 길로 다니는 선생님들의 바짓가랑이를 적시고 더럽히는지라 햇볕이 따사로운 점심시간을 이용해 함석으로 새로 짠 물통을 바닥까지 닿게 사다리를 받쳐놓고 열심히 끼워 맞추고 있는 그때, 끊는 피가 용솟음치는 18세가 뿜어내는 엄청난 양의 급류를 두 분이서 순식간에 피할 겨를도 없이, 잘못 움직이면 사다리에서 낙상하는 결과를 초래할지도 모르는 그 상황에서 울며 겨자먹기로 뒤집에쓸 수 밖에 없었던 사연, 머리카락을 타고 눈을 거치는 순간 따가움을 느낀 두 분, 코밑을 흐를 때야 의심했고, 입이 낮은 곳에 임한 죄로 본의 아니게 맛까지 보고 나서 "아, 이거구나."를 외친 두분.
저는 "밤새 안녕하셨습니까?" 라는 인사말이 무엇 때문에 생겨났는지를 실감했고, 그 후로 쉬는 시간, 점심 시간을 그곳에서 실례하는 범인을 색출, 신고하는 비밀요원의 임무를 띠고 한달 동안이나 쌈치기 한번 못해보고 세월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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