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음이 묻어나는 편지 - MBC 예술단 엮음
둘 - 생활속에 피어나는 웃음안개
"현철"이는 괴로워
제 이름은 현철입니다. 남자냐구요? 아들도 둘 있고 잘생긴 남편도 있는 미모의 여자입니다. 그런데 왜냐구요? 전 요즘 괴롭습니다. 바로 현철이 때문이에요. 전 정말 조용히 살고 싶답니다. 그런데 왜 세상은 절 이렇게 괴롭히지 않으면 안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지금부터 38년전, 전 5녀 1남중 장녀로 태어났습니다. 딸로 태어난 게 실수였는지 그때부터 저의 시련의 싹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부모님은 저의 이름을 어질 현, 맑을 숙자로 조금은 촌스러운 듯하면서도 여자다운 이름으로 지으셨습니다. 그런데 1달 후 출생신고를 하러 읍사무소에 가신 아버지께서 똑같이 출생신고를 하러 오신 동창생을 만난게 비극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분은 아들을 출생신고 하신다면서 저희 아버지께 물으셨습니다.
"넌 뭐냐?"
"나도 아들이야."
샘이 나신 아버지께서는 저를 순식간에 아들로 만드셨고, 맑을 숙자 대신 밝을 철자로 바꾸신 거에요. 그래도 다행인 것은 성별은 바꾸지 않으셨다는 거지요. 집에 오시자 어머니께서 야단이 나셨지만 그땐 이미 끝난 뒤였어요. 전 초등학교 시절 현철이란 이름으로 씩씩하게 자랐습니다. 남자들과도 코피나게 싸우고 그네에서 떨어져 머리를 10바늘 꿰메도 눈물도 흘리지 않고 말이에요. 그때까지는 평온했습니다. 중학교, 고등학교에 가서도 선생님께 강한 인상을 남기며 (학기초 제일 먼저 이름을 외우심) 행복했습니다. 그런데 대학교에 가면서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어요. 미팅만 가면 다른 친구들은 미지, 순화, 경희 등등 자신있게 이름을 밝히는데 전 그럴 수가 없었거든요.
"전 현철입니다."
제가 이렇게 제 이름을 말하는 순간 분위기가 썰렁해지면서 시선을 한몸에 받기 시작하더라구요. 미모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그 뒤로 전 이름을 밝힐 수가 없더라구요. 차라리 예명을 지어볼까도 생각해 보았죠. 유지인(?), 장미희(?) 그땐 최고 인기였거든요. 그러나 생각해 냈죠. 주민등록번호 조회할 곳이 아니면 최현숙, 조회 대상이면 최현철. 마음이 조금은 평안해졌지만 더 곤란해지기 시작했어요. 미팅에서 만난 남자애들과 친해지기 시작하면서 전 출생부터의 스토리를 다 설명해야 됐으니까요. 정말 그 짓도 못하겠더라구요. 그러다 남편을 만나 결혼을 하기로 했는데 또 고민이 생긴거예요. '신부 최현숙'이라고 해야 하나, '신부 최현철'이라고 해야 하나, 하객들의 수군거림을 생각하면 끔찍했거든요. 그래서 가족회의에서 '신부 최현숙'이라고 하기로 했죠. 전 결심했습니다. 아이를 낳으면 정말 세련되고 멋있는 이름을 지어 주어야겠다구요. 그러면 아이가 얼마나 이 엄마에게 감사할까. 전 이름에 대한 한을 풀기로 했어요. 첫 아들이 태어났을 때 전 외자로 이름을 지어 주었습니다. '휘.' 얼마나 멋있고 세련되고 기억에 남습니까? 그런데 아들이 저를 원망하는 거예요.
"왜, 내 이름만 두 자예요? 다른 애들은 세 잔데. 내 별명이 휘바람이라구요."
기가 막혀서.... 배가 불러도 유분수지, 그렇게 멋있는 이름을. 그래서 둘째 아들 이름은 10만원을 주고 작명소에서 지었죠. 그래도 난 아이들한테 한을 풀었다고 생각하고 조용히 살려고 했어요. 그런데 그게 뜻대로 안되더라구요. 몇 년 전에 직장에 나가게 되었는데 그때 가수 현철씨가 한창 뜰 때였어요. 회식 때면 다들 한마디씩 하는 거예요.
"현철씨, 현철씨 노래 봉선화 연정 좀 불러 봐."
전 정말 괴로웠습니다. 뽕짝을 싫어했던 제가 시도 때도 없이 현철이라는 이름 하나 때문에 봉선화 연정을 불러 댔으니까요. 정말 읍사무소에서 만난 아버지의 동창생이 원망스러웠습니다. 현철씨의 인기도 식을 무렵 저도 직장을 그만두었습니다. 잠시는 조용했습니다. 가끔식 동사무소에 일보러 가서 이름을 불러줄 때, '남편 말고 본인의 이름을 말하세요'라든가 아들과 함께 한 자리에서 최현숙이라고 하면 눈치 없는 우리 아들이 소리치며 '엄마 이름은 최현철이잖아요' 하는 정도는 참을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또 현철이라니-! 이젠 노래로도 안되고 인내로도 안되고.... 며칠 전, 남편이 술취해 들어와서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이게 현숙이야, 현철이야. 난 정말 대단한 사람하고 산단말이야."
전 대단한 결심을 하고 호적정정을 한다는 사무실에 가서 상담을 했습니다.
"제 이름을 바꿀려고 하는데요. 될까요?"
"안되겠습니다. 배신자도 아니고, 임신중도 아니고, 최현철 정도면 그냥 사세요. 그 나이에."
아니 제 나이에는 이런 시련을 겪어도 이름을 바꿀 수 없단 말입니까? 정말 현철이는 괴롭습니다. 요즘 저희 아버지께서 하시는 말씀은 저를 더 슬프게 합니다.
"여자 이름 최현철은 큰 인물이 될 이름이다. 넌 감사해야 돼."
전 큰 인물도 싫습니다. 어차피 큰 인물되기는 틀렸고, 그냥 예쁜 이름으로 아니 최현숙이라도 남들 앞에서 큰 소리로 얘기하고 싶습니다.
"제 이름은 최현숙입니다. 현철이가 아닙니다."
그리고 정말 조용히 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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