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음이 묻어나는 편지 - MBC 예술단 엮음
하나
추억이라는 이름의 웃음여행
원수를 사랑하라
김인순(여.동대문구 휘경2동)
제가 여고 1학년 때의 일입니다. 우리한테 '왜 사냐?'고 물으면 우린 항상 손가락으로 '존재의 이유' 바로 그분을 가르키곤 했습니다. 삼신할매의 최고의 걸작품이었던 우리의 생물선생님. 지금도 그 휘황찬란한 모습을 생각할 때면 목이 메이는 건 기본. 옆에서 자고 있는 남편까지 걷어차 버리고 싶을 정도지요. 키는 버스 환기통을 모자로 쓰고 달릴 만큼 크셨고, 얼굴은 삼신할매한테 도대체 얼마나 썼길래 저런 대리석 조각이 나왔을까 할 정도였습니다. 이분이 만약 연예계로 방향을 틀었다면 요즘 잘나간다는 배용준의 밥줄도 무사하진 못했을 겁니다. 그뿐이겠습니까? 끊어진 밥줄 올려다보며 '백수의 골짜기'에서 땅을 치며 '한오백년'을 부르는 모습도 눈에 선합니다. 유머감각은 또 어떤가요? 서세원이 발바닥에 로켓 엔진을 달고 뛰어도 택도 없을 겁니다. 하품도 그분이 하면 머리를 풀어헤치고 그분의 입속으로 뛰어들어가 밥이 되고 싶었고, 하부에서 가끔씩 독가스가 뿜어져 나올 때도 '내 남자의 향기'라고 부르짖고 싶을 정도 랍니다. 여하튼 목소리, 걸음걸이, 세련되고 정확한 서울 말씨 등등 모든 면에서 A+만점을 받은 정도로 정말 매력적인 분이셨지요. 오죽하면 별명이 '태양'이었겠습니까? 이와는 반대로 외모부터 숙명적인 라이벌일 수밖에 없었던 분이 바로 국사 선생님. 키는 등소평, 얼굴은 안방에 누워 있는 메주를 닮아 웃돈까지 줘가며 도로 물리고 싶을 만큼 '리바이벌'을 허용치 않는 기념비적인 얼굴이었지요. 유머감각만 해도 사흘이 멀다 하고 시베리아 경찰이 와서 '선생스키, 고향에서 잡아오라스키, 이번에는 가면 언제올지 모른다스키'하며 끌고갈 정도로 간담이 '썰렁" 그 자체였습니다. 거기다 억수로 심한 경상도 사투리 하며, 궁둥이 양쪽에서 오리 두 마리가 부활할 것 같은 걸음걸이 등 많은 부분이 우리들에게 엄청난 고통과 괴로움을 선사했습니다. 그래서 붙여진 별명 '백팔번뇌!' 그 당시 우리에게 최고의 찬사는 '태양한테 열받았어?', 가장 심한 욕은 '백팔번뇌와 눈이 맞았어?'였습니다. 사태가 이러니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 태양열을 조금이라도 더 받으려고 기를 써야 했습니다. 주머니가 가득한 애들은 아침마다 꽃이나 책으로 선물공세를 했는데, 우리는 얘들을 '매수파'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또 얼굴과 몸매가 따라줘서 요란하게 치장하고 오는 애들은 선생님의 마음을 흐려 놓는다고 해서 '미꾸라지파', 이와는 달리 저처럼 청렴결백하고, 몸매를 초월한 애들, 그래서 아침마다 물동이 이고 한손엔 물걸레나 빗자루를 들고 와서 가식없이 몸으로 때우는 애들은 '육체파'라고 불렀습니다. 삼파전이었지요. 나중에 밑천이 떨어진 매수파가 미꾸라지 휘하로 들어가서 '부자파'라는 이름으로 새로 태어나는 바람에 저희가 상당히 고전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전체적으로 보면 저희의 승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쓰라린 이름을 줬던 최초의 혈투, 일명 '혈액형 전투'에서의 패배는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혈액형 실험이 예고된 날로, 우리는 쉬는 시간부터 손가락을 떡주무르듯 주무르며 저마다 신성한 제단의 제물이 되길 학수고대했지요. 각 혈액형당 1명씩 해서 모두 4명의 피가 필요했는데, 먼저 A형은 우리의 국보 고청자(고려청자)의 승리가 거의 확실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불여우 국가대표 강미형이 간드러진 목소리로 말하는 겁니다.
"선생님요, 선생님이 드라큘라면 지는 맛있는 밥이 될랍니더. 자, 드이소."
'아니 이럴 수가! 다된 밥에 재를 뿌려도 유분수지, 요망한 것 같으니라구.' 다음은 AB형. 애석하게도 이 형은 딱 한사람밖에 없었는데, 그 애는 꿋꿋하게 자기만의 독자노선을 걷는 애로 수업시간엔 주로 책상에 엎드려 코로 트럼펫을 불고, 이빨로 무전을 치며, 침으로 세수를 하는데, 가끔씩 악몽을 꿀 때면 허공으로 손을 높이 올리기도 했지요. 그날도 악몽을 꾼 탓인지 상황판단도 못하고 겁없이 손을 드는 바람에 게슈타포에게 끌려가는 유태인처럼 허옇게 질린 얼굴로 울부짖었습니다.
"난 아니에요, 난 피가 모자라요, 아아-, 싫어요."
끝내 끌려가서 피를 보고야 말았습니다. 다음은 B형. 지원자가 많아서 '가위, 바위, 보'를 했는데, 그 가시나들 참 억수로 잘하는기라요. 마지막 남은 O형. 우리 육체파의 희망, 바로 제가 나섰습니다. 제 손이 명색이 기적을 부르는 손인데, 그깟것 하나 못했겠습니까? 하지만 전체점수 2-1로 저희의 패배로 끝나고 말았지요. 방과후 전후 처리와 앞으로 다가올 대전을 위해 논두렁회의를 가졌습니다. 주제는 선생님 생신 선물에 관한 것이었는데, 달력을 보니 마침 복날이더군요. 그래 팔 걷어붙이고 나가 한 마리 잡아 드리기로 했지요. 아무래도 전문가의 조언이 필요할 것 같아 비록 국가에서는 포기한 인간문화재지만 그래도 이 분야 최고의 권위자이신 저희 할아버지께 여쭸습니다.
"할배요, 개는 우찌 잡습니꺼?"
"가시나가 건 와 묻노?"
"우리 선생님 몸이 시원찮아서..."
"뭐라꼬? 그라믄 느거 선생이 니보고 개 잡아오라 그러드나? 내 이놈의 선생 다리 몽둥이를 확 뿐질러 뿔끼다."
"아입니더, 그게 아니고예 지가 묵을라꼬..."
"뭐라꼬? 그라믄 니가 지금 꼭두새벽부터 개 잡아묵겠다고 설쳐대는기가? 이 가시나가 맞아 죽고 싶나. 퍼뜩 안 들어가나!"
이리하여 개 한 마리는 목숨을 부지할 수 있게 됐습니다. 다시 열린 제2차 논두렁회의를 통해 내려진 결정은 자장면이었는데, 문제는 4교시인 생물 시간에 맞춰 그걸 어떻게 가져오느냐였지요. 궁리 끝에 우리는 백팔번뇌를 따돌리고 수위 아저씨를 매수하여 교문을 넘자는 기가 막힌 계획을 세웠습니다. 드디어 3교시 국사시간, 약속대로 청자가 먼저 손을 들더군요.
"선생님요, 화장실이 지를 부릅니데이."
"쪼끔만 참아라이."
"안됩니더, 억수로 큰 건데 우찌 참습니꺼?"
"그 가시나 참, 지저분하게 노네. 퍼뜩 가그라."
"쪼끔 오래 걸릴 낀데, 괜찮십니꺼?"
"그 가시나 참, 니 맘대로 가서 내다 팔고 오든, 집어 묵고 오든 맘대로 해 뿌리라 안카나."
다음엔 제 차례였습니다.
"닌 또 뭐꼬?"
"지도 배가 아픕니데이."
"꾀병 아이가?"
"아입니더."
"니도 오래 걸릴 끼가?"
"그럴 낌더."
영문을 모르신 선생님은 얼굴을 찌푸리셨지만, 어쨌든 우리의 계획은 성공!
"이반 가시네들은 다 와 이카노?"
이렇게 우린 밸팔번뇌를 따돌리고 운동장에서 만나 담배 한갑으로 수위 아저씨를 매수한 뒤 여유 만만하게 자장면을 사왔습니다. 드디어 기다리던 생물시간, 예상대로 부자파는 케이크를 내놓더군요. '미련한 것들, 저희들 제삿밥이 될 줄도 모르고... 하하하.' 다음엔 우리 차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자장면을 내놓자 선생님께서는 감탄 또 감탄하셨습니다. 왜 안 그렇겠습니까. 그날 자장면은 환희의 송가를 부르며 선생님의 입속으로 넘어갔고, 케이크는 최후의 한 조각까지 반 친구들의 이빨에 사정없이 뭉게져서 처절한 장송곡을 부르며 우리들의 밥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승리감에 도취될 사이도 없이 또 끔찍한 일이 터지고 말았습니다. 그것도 국사시간에 말입니다.
"봐라, 느거들은 모르제? 느거들 태양이 각시델꼬 비행기 타고 날른다카드라. 걱정 말그레이, 내는 절대로 느거들을 배신하지 않는데이. 느거들을 두고 우찌 가겠나?"
세상에 몽룡이가 떠난다는 마당에 학도가 온다꼬 춘향이가 춤을 추겠습니꺼? 사태가 급박한지라 우리는 부자파까지 불러 제1차 방앗간 회담을 열었습니다. 선생님을 낚아챈 그 여우가 누군지 찾아서 응징을 하자는 의견, 막강한 테러리스트를 사서 둘 중 하나를 납치하자는 의견 등 분분했지요. 하지만 일단은 진상을 아는 게 급선무라 태양께 그 여우가 누구고 뭣땜시 결을 하는지 따져 물었습니다. 그러자 선생님께선 그 동안 백팔번뇌한테 사사받은 사투리로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그 여우는 내 동창이고, 그 여우랑 결혼하는 이유는 원수를 사랑하는 우리집 전통이라 그렇데이. 누가 또 아나? 가정의 평화는 세계 평화라꼬, 노벨상 남는 거 있으니 하나 가져가라 할지. 그래되면 느거들 머리에 꽃달고 꼭 와야 된데이."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겠습니까? 방과후 열린 제2차 방앗간회담에서 우리는 그 여우한테 선생님을 보내드리고 나중에 선생님이 상을 받게 되면 머리에 누룽지라도 달고 이곳을 뜨자고 합의를 봤습니다. 그 때문인지 지금도 매년 가을이면 떨리는 가슴을 안고 신문을 주시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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