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부터 24년 전! 1973년 제가 중학교 2학년 때. 그당시만 해도 학교에서는 반드시 펜과 잉크만을 쓰도록 하여 우리들은 모두 가방 속에 잉크를 넣고 다녔지요. 볼펜은 글씨체가 안 좋아진다고 못쓰게 했죠. 잉크를 깜박 잊고 안 가지고 가면 잉크 몇 번 찍어 쓰려고 옆에 않은 친구에게 아양도 떨어야 했고, 가끔씩은 잉크를 쏟아 낭패를 당하기도 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정말 그 당시 나름대로 낭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글씨를 제대로 배우라고 그랬던 것 같은데 워낙 개구장이들이라 재미있는 사건사고들이 많았지요. 잉크병 뚜껑을 제대로 잘 닫지 않아 책가방이며 도시락이며 온통 잉크 범벅이 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고, 책상이며 교과서, 공책들도 그 놈의 잉크로부터 무사하지를 못했지요. 그래서 잉크에 얽힌 얘기를 하나 할까 합니다.
여름 어느 날 오후, 쉬는 시간에 옆에 앉은 김좌진이라는 같은 반 친구와 무슨 일인가로 장난 끝에 말다툼을 벌였지요.당시 그 친구는 이름 때문에 놀림을 많이 받았는데 아마 그때도 제가 그 친구를 '긴자지'라고 별명을 불러서 다툼이 시작됐을 거예요. 조금은 그 친구에게 겁을 주려고 웃으면서 저는 잉크병을 집어들었지요.
"너 자꾸 까불면 이 잉크를 얼굴에 뿌려 버린다."
잉크병의 뚜껑은 당연히 닫혀 있었으므로 그냥 위협이나 주려는 의도로 겁을 주었지요. 그 친구는 설마 제가 잉크를 진짜로 뿌리겠냐 싶어서 못생긴 얼굴을 제 코 앞에다 내밀며 약을 올리지 않겠어요.
"그래 너 깡다구 있으면 어디 한 번 뿌려봐라. 뿌려뿌려."
저는 잠시 머뭇거리며 속으로 생각했습니다.'기왕에 뽑은 칼, 아니 잉크명! 한 번 던지는 시늉이라도 해보자.' 저는 비겁자가 되기는 싫고 해서 힘껏 잉크병을 그 친구 얼굴에 대고 휘둘러 버렸지요. 아뿔싸! 그런데 이게 어찌된~일. 닫혀있는 줄 알았던 뚜껑이 날아가 버리고 그 친구의 얼굴이며 하얀 빛깔의 교복 위에 뒤범벅이 되는 거예요. 그 친구의 얼굴은 순식간에 아프리카 껌둥이로 바뀌고, 반짝반짝 줄을 세워 다려 입은 하얀 교복은 얼룩무늬 예비군복으로 변해버렸으니 엄청난 일이 벌러진 겁니다. 잉크를 쓰다가 뚜껑만 살짝 올려놓은 걸 모르고 잉크병이 닫힌 걸로 깜박한 순간적인 착각의 결과였지요.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그 친구는 멍하니 나를 처다보고 있더군요. 새까만 얼굴에 하얀 두 눈자위만 멀뚱하게 바라보는데 정말 가관이더군요.속으로 웃음이 나오는 걸 억지로 참고 있는데 그 놈의 누런 이빨이 그날 따라 왜 그렇게 뽀얗게 보이는지.....그때는 다른 방법이 없더라구요. 삼십육계 줄행랑이 최선의 방법이겠다 싶어서 댑다 달렸지요. 물론 그 친구는 화가 머리 끝까지 나서 한 손에는 잉크병을 들고 제게 뿌리려고 달려왔지요. 그 친구는 당연히 제가 일부러 잉크를 얼굴에 뿌린 걸로 생각하고 나를 잡아죽일 듯이 달려오더군요. 제가 당시 달리기는 한가닥 했는데 그 친구 워낙 고릴라 같이 화가 나서 달려오니 벤존슨은 저리 갈 정도의 초능력을 발휘하더라구요. 제가 순발력이 있어 스타트는 조금 빨랐지만 곧 잡히게 되어 교실 모퉁이에서 급회전을 해 막 돌아섰는데, 그 친구는 내가 사정거리 안에 들어왔다 싶었는지 들고 있던 잉크병 뚜껑을 열고 잉크를 냅다 뿌려댔습니다. 아이고! 그런데 저는 교실어귀를 잽싸게 돌아 날아오는 그 시커먼 잉크덩어리를 무사히 피했는데, 그때 마침 양손에 철가방을 들고 선생님들이 시킨 자장면 배달을 오던 좋은 철가방 아저씨가 교실 모퉁이를 돌아서다가.... 그만 그 친구가 던진 잉크 세례를 제 대신에 고스란히 받았지 뭐예요. 양손에 철가방을 들고 있었으니 피할 수도 없이 말입니다. 얼굴에 잉크 세례를 맞은 그 아저씨 콧구멍에서도 잉크가 주르를 흘러내리며 영락없는 깜둥이가 되더군요. 저는 달아나다가 이 엄청난 상황을 슬금슬금 살펴보니까 그 덩치 큰 철가방 아저씨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씩씩 대시다가 무슨 생각을 하셨는지 말없이 철가방을 열더니 간장통을 꺼내더군요. 길쭉하고 양쪽으로 간장이 나오게 되어 있는 간장이 꽤 많이 들어가는 호리병 같은 간장병이었지요. 저는 혹시 옷에 묻은 잉크를 지우는데 간장이 무슨 큰 특효가 있어 옷과 얼굴에 바르려고 그러는 줄 알고 자세히 보고 있자니 그 아저씨 아주 근엄하고 차분히 간장통의 뚜껑을 열더라구요. 김좌진이라는 친구는 지은 죄가 있어 잔뜩 겁에 빌려 있는데 철가방 아저씨는 갑자기 그 친구 얼굴에다 간장을 냅다 뿌리는 거예요. 이종환, 최유라씨! 혹시, 잉크 세례 받은 데다 간장벼락까지 이중탕으로 맞아 보신 적 있나요? 맞은 데 또 맞으면 더 많이 아프듯이 그거 정말 못할 짓이데요. 냄새 지독하고....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 친구 얼굴이나 교복에 그래도 빈곳이 군데군데 있었는데 이번에는 간장으로 아주 말끔히 새까맣게 도배를 해버리더군요. 그리고는 시커먼 두 사람이 씩씩대며 얼굴을 쳐다 보다가 그 철가방 아저씨는 철가방을 챙겨 무슨 생각에선지 다시 돌아가더군요. 아마 잉크로 도배를 한 위에 간장으로 마무리를 해 시커먼 얼굴을 하고 잔뜩 화가 나 있는 그 친구에게서 보상받을 게 별로 없다고 판단을 했던것 같아요. 또 시커먼 얼굴로 도저히 교무실을 들어갈 수가 없다고 판단했겠지요. 아마 그날 어느 선생님인가는 저희들 덕분에 영문도 모른 채 오지 않는 자장면을 애타게 기다리다 점심을 쫄쫄 굶었겠지요. 잉크 세례 받은 자장면 배달 아저씨는 돌아가서 주인에게서 또 얼마나 혼이 났을까요.
잉크에 간장까지 발랐으니 이제는 도저히 저를 잡으러 올 생각마저 없었는지 그 친구는 수돗가로 가더니 웃통을 벗어 씩씩거리며 열심히 교복을 빨고 얼굴을 닦더군요. 저는 한 7교시쯤 조심스레 교실로 돌아왔습니다. 그 녀석은 자리에 없었고 나중에 다른 애들에게 물어보니 그 친구의 모습이 얼마나 시커멓고 기가 막혔던지 아이들이 자꾸 웃고 또 간장냄새가 온 교실을 진동하여 선생님들이 도저히 수업진행이 안된다고 일단 집으로 돌려보냈다고 하더군요. 그 당시 잉크도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저는 잘 번지지 않고 물에 퍼지지 않는 제일 좋은 P사의 잉크를 쓰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리 좋은 비누로 지워도 알굴에 묻은 잉크가 쉽게 지워지지 않아 그 친구는 한 3,4일은 얼굴과 단벌 교복에 잉크를 바른 채로 다녔지요. 그후 그 친구는 잉크 자국이 다 지워질 때까지 들어오시는 선생님들마다 너만 왜 교련복(당시만 해도 교련시간에는 얼룩무늬 교련복을 입었음)을 입고 왔느냐며 혼냈으며, 그때마다 저를 죽일 듯이 째려보는 무서운 눈길을 감수해야 했지요.
제가 잉크를 얼머나 쎄게 뿌렸는지, 아니면 그 친구가 그때 입을 벌리고 있었는지 그 친구의 입과 콧구멍 속에까지 잉크가 잔뜩 묻어 잘 지워지지 않는다고 툴툴대더군요. 그렇지만 우리는 서로 화해를 하고 더욱 좋은 친구사이로 아주 보람찬 학창시절을 잘 보냈습니다. 지금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지 지금 이 시간을 빌려 그 김좌진이라는 친구에게 다시 한번 그때는 정말 미안했었다는 마음을 전하고 싶고, 또 하필 그때 자장면 배달을 왔다가 잉크로 날벼락을 맞은 운 없는 철가방 아저씨! 말 한마디 없이 시원하게 화풀이를 했던 그 아저씨도 지금쯤은 큰 중국집 주인이 되어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이 자리를 빌려 미처 사죄를 못한 그 철가방 아저씨께 죄송하다는 말씀을 전해 드리고 싶네요. 그 당시에는 정말 심각하고 걱정이 되었는데 요즘 같으면 세탁비다 손해배상이다 했을 텐데 그때만 해도 정말 후덕한 세상이라 더 이상 문제삼지 않은 철가방 아저씨를 꼭 한번 만나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