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미야, 내가 보낸 꽃카드는 받아 보았겠지? 며칠 전 무척 오랜만의 통화에서 "언니, 춘천의 가을 하늘이 너무 고운데 꼭 한번 오세요. 예?"라는 그 상냥한 목소리의 초대를 받고 나는 11월이 가기 전에 엽서라도 한 장 보내고 싶었단다. 어린 시절 방학 때 내가 너의 집에 놀러 가면 너는 식물채집하는 나를 부지런히 따라다니며 도와 주곤 했었는데 어느새 여고생 딸까지 둔 몇 아이의 엄마가 되었음이 새삼 신기하다. 너에게 고모이기도 한 나의 어머니가 지난 주에 이곳 부산엘 다녀가셨는데 그분은 이번에도 당신의 고향인 강원도의 아름다움을 한껏 자랑하시더구나. 얼마 살진 못했지만 나의 출생지이기도 한 양구에서의 어린 시절 추억을 이야기해 주시던 어머니의 그 모습에선 아직도 깊고 맑은 강원도의 산골물 소리가 흐르는 것만 같았어.
오늘은 주일이라 모처럼 틈을 내어 배추밭, 파밭, 무밭을 한바퀴 둘러보았는데 배추, 파, 무잎들의 푸르고 싱싱한 웃음소리가 쏟아지는 것만 같았어. 한 달 전에 우리가 심어 놓은 마늘들도 한 뼘 가까이 싹을 틔우는 걸 보고 항상 열려 있는 밭의 생명성과 어머니다움을 새롭게 묵상했다. 정성껏 씨를 뿌리기만 하면 무엇이든지 키워서 열매로 내어 놓는 밭, 자주 잊혀지면서도 묵묵히 제 소임을 다하는 밭처럼 나도 충실하고 겸허하게 살아야겠다고 다짐하며 밭 둘레의 나무들을 돌아보았지. 소나무, 사철나무, 히말라야송, 회향목 등 오랜 지기처럼 정다운 수녀원의 상록수들은 한결같은 푸르름으로 내게 희망과 용기를 심어 주곤 했단다. "아니, 이곳 상록수들은 어쩌면 이렇듯 반들반들하지요? 기름칠한 것처럼 윤이 나네요"라고 손님들이 감탄을 하면 나는 마치 내가 칭찬을 듣는 것처럼 반갑고 흐뭇한 마음이야. 밭과 나무들 주변에는 새들도 자주 모여들곤 하는데 특히 까치와 비둘기는 수녀원의 안뜰까지도 스스럼없이 찾아와 여유 있는 산책을 즐기곤 하지. 검은빛과 흰빛이 잘 조화된 까치와 흰빛, 회색빛 비둘기는 우리가 입은 옷 빛깔과도 흡사해서 더욱 한 식구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날아 오름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나의 기도는/ 새로움의 빛에 대한/ 새로운 고마움`이라는 구절을 떠올리게도 했던 새들을 보면 나도 새처럼 단순하고 고독한 자유인이 되고 싶다는 갈망을 더욱 새롭히게 된단다. 상록수 위에 떨어져 더욱 눈에 띄는 단풍잎들 중 몇 개를 집어 들고 방으로 오면서 성당 위의 종탑을 올려다보니 `종소리는 천국에 가장 가까운 음악`이라던 누군가의 말이 떠올랐다. 하루 세 번 어김없이 삼종을 알리는 종소리를 들으며 우리 동네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문득 궁금해질 때가 있다. 숙미야, 네가 직접 와본 일은 없지만 내가 사는 곳의 정경을 이제 조금은 그려 볼 수 있겠니?
머지않아 곧 12월이 올테고, 월동 준비로 몸도 마음도 바빠지는 요즘 우리는 벌써 성탄맞이 대청소를 시작했단다. 구석구석 먼지를 털어내고 걸레질하며 집 안을 깨끗이 하다 보면 마음까지도 깨끗해지는 느낌이야. 하긴 한 해의 정리 작업인 마음의 대청소도 잊지 말아야겠지. 다가오는 새해에도 너는 가정에서, 나는 수도원에서 각자의 마음과 삶을 더욱 열심히 갈고 닦는 `수녀`가 되어 기도 안에서 만나길 기도해 본다. 내가 만나 뵌 지 오래된 외삼촌, 외숙모에게도 문안드려 주길 바라면서 오늘은 이만 줄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