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할 땐 별이 되고 - 이해인
수평선을 바라보며 - 노영심에게
"바다는 짜다. 그가 적당히 짠 것은 자신에 대한 신고이다. 그래서 부패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가슴에 품은 모든 생명이 달콤한 나태에 빠지지 않게 한다. 그는 스스로 죽지않는 생명이며 남을 위한 소금인 것이다. 바다는 언제나 그 등어리에 태양을. 동반하면서도 나의 눈높이 아래서 일렁이고 있다." 최근에 몇 번이나 되풀이해 읽은 황덕중님의 <바다>라는 수필의 일절을 소개하며 지금은 먼 여행길에 있을 영심의 모습을 그려 봅니다. 얼마 전에 인편으로 보내 준 앙증스런 십자가와 카드는 잘 받았어요. 이곳을 두 번째 방문했을때 우리가 함께 보았던 고운 무지개를 크레용으로 그린 걸 보니 무척 인상적이었는가 보지요? 나만큼이나 바다를 좋아하는 영심에게 나도 오늘은 수채화용 물감으로 하늘 같은 바다, 바다 같은 하늘을 그려 보내고 싶군요.
난 얼마 전에 언덕 위의 솔숲 집으로 방을 옮겼는데 이 방의 이름을 `솔숲 흰구름방`이라고 혼자 정해 놓고 즐거워 한답니다. 여기서 일터까지는 천천히 걸어도 3,4분밖에 안되는 거리지만 수평선을 바라보며 걸을 수 있는 기쁨이 있어 늘 새롭답니다.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수평선을 바라보면 영원한 하느님도, 끝없이 출렁이는 사랑도 더 가까이 있는 것만 같고, 내안에 자리했던 욕심, 미움, 원망, 분노의 찌꺼기들이 사라지고 텅 비어 버린 수평의 마음이 되는 것을 느낍니다. 날마다 수평선을 바라보며 기도하고, 밥을 먹고, 일을 하다 보니 바다가 없는 도시엘 가면 이내 답답하고 지루해져서 꿈에도 자주 바다가 펼쳐지곤 합니다. 꽉 짜여진 규칙적인 일상 안에도 어느새 바다가 스며들어와 긴장과 단조로움을 잊게 해주고, 나의 좁은 소견으로 어떤 사람과의 관계가 트이질 못해 괴로워할 때도 바다는 파도를 일으키며 달려와 "넓어져라, 넓어져라" 하는 속삭임만으로는 안되는지 물살로 사정없이 나를 때려 주곤 합니다.
해가 떠오를 때는 만남과 생성의 환희 가득한 아름다움을, 해가 질 때는 이별과 소멸의 애틋한 아름다움을 내게 보여 주며 무한대의 아름다움으로 길게 누워 있는 수평선을, 그 푸른 음악과 시를 사랑합니다. 바닷가에서 휴가를 즐기는 많은 사람들에게 나는 "수평선을 바라보세요, 움직임을 멈추고 모래밭에 앉아 고요한 마음으로 수평선을 바라보면 푸른 평화가 고여 오는 소리가 들릴 거예요" 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조용하고도 힘찬 바다의 소리를 영심인 피아노 소리에 담을 수 있을테지요? 레이스 달린 원피스를 즐겨 입는 영심이가 이곳에서 피아노 치고 노래하던 일, 이야기하다 말고 눈물을 보이던 일, 일기장을 가슴에 꼭 품고 다니던 일, 함께 조가비를 주으며 즐거워하던 일이 잔잔한 그림으로 떠오르네요.
누구에게나 편안함을 느끼게 하는 해맑고 자연스런 웃음, 바빠도 서두르지 않는 태도와 꾸밈 없는 말씨의 은은한 매력을 지닌 음악인, 늘 작은것에도 의미를 부여하며 기도하고, 꾸준히 선과 사랑을 추구하고 실천하려는 영심의 그 모습이 반갑고 고마워요.지난번엔 파푸아뉴기니에 갔다가 그곳의 한국 수녀님들로부터 세실리아라는 이름까지 미리 받았다니 조금은 부담이 되겠지만 언젠가는 영세를 받도록 나도 기도 할까요?
무척 아름답다는 시애틀에서의 남은 일정도 잘 마친 후 더 성숙한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나 멋진 `이야기 피아노` 도 들려줄 수 있길 기대합니다. 난 올해 안으로 해남 땅끝 마을과 목포에 있다는 조개 박물관에 가보고 싶은데 뜻대로 될지 모르겠군요. 오늘은 치자꽃 향내 나는 주일, 잠시 창문을 열고 수평선에 눈을 씻은 다음 저녁기도에 가야겠어요. 안녕.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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