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 오늘은 하루 종일 비가 내립니다. 창 밖으로는 새소리가 들리고 온통 초록빛인 젖은 나무들 사이로 환히 웃고 있는 붉은 석류꽃의 아름다움을 보여 드리고 싶습니다. 비오는 날은 가벼운 옷을 입고 소설을 읽고 싶으시다던 스님. 시는 꼿곳이 앉아 읽지 말고 누워서 먼산을 바라보며 두런두런 소리내어 읽어야 제 맛이 난다고 하시던 스님. 오늘 같은 날은 저도 일손을 놓고 좋아하는 음악을 듣거나 시를 읊으며 `게으름의 찬양`을 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제가 `솔숲 흰구름방`이란 이름을 붙인 이 자그만 방엔 아직 마늘 냄새가 가득합니다. 어제 아침 저희 식구 모두 밭에 나가 마늘을 거둬들이고 저녁엔 물에 불린 마늘은 열심히 벗겨 내는 작업을 계속했더니 옷에 배인 냄새가 쉽게 가시지를 d않습니다.
가끔 삶이 지루하거나 무기력해지면 밭에 나가 흙을 만지고 흙냄새를 맡아 보라고 스님은 자주 말씀하셨지요. 최근에 펴낸 스님의 명상 에세이집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를 보내 주셔서 기뻤고, 이 책에 대한 독자들의 뜨거운 반응에 대해서도 축하드립니다. 스님께서는 요즘 어떤 책을 읽으시는지요? 저는 `어른을 위한 동화`라는 부제가 붙은 안도현 시인의 <연어>와 니시오카 스네가쓰의 <나무의 마음, 나무의 생명> 그리고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비둘기>를 읽었답니다. 며칠 전엔 스님의 책을 읽다가 문득 생각이 나 오래 묵혀 둔 스님의 편지들을 다시 읽어 보니 하나같이 한폭의 아름다운 수채화를 닮은 스님의 수필처럼 향기로운 빛과 여운을 남기는 것들이었습니다.
이미 고인이 되신 김광균 시인 댁을 방문했을 때 스님께서 붓글씨로 써 보내신 편지 한 통을 곱게 표구해서 서재에 걸어둔 것을 매우 반갑고 인상 깊게 바라보던 기억이 있습니다. 스님의 글씨를 꼭 지니고 싶어하는 가가운 친지들에게 스님의 허락 없이 저도 편지 몇 통을 나누어 주긴 했지만, 항상 나무, 꽃, 새, 바람 이야기가 가득하고 영혼의 양식이 되는 책, 음악, 차 그리고 맑고 잔잔한 일상의 이야기가 담겨진 스님의 편지들이 새삼 소중하게 여겨지는군요. 언젠가 제가 감당하기 힘든 일로 괴로워할 때 회색 줄무늬의 정갈한 한지에 정성것 써보내 주신 글은 불교의 스님이면서도 어찌나 가톨릭적인 용어로 씌어 있는지 새삼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수년 전 저와 함께 가르멜수녀원에 가서 강의를 하셨을 때도 `눈감고 들으면 그대로 가톨릭 수사님의 말씀`이라고 그곳 수녀들이 표현했던 일도 떠오릅니다.
`...수녀님, 광안리 바닷가의 그 모래톱이 내 기억의 바다에 조촐히 자리잡습니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재난들로 속상해하던 수녀님의 그늘진 속뜰이 떠오릅니다. 사람의, 더구나 수도자의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리기만 한다면 자기도취에 빠지기 쉬울 것입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어떤 역경에 처했을 때 우리는 보다 높은 뜻을 찾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그 힘든 일들이 내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알아차릴 수만 있다면 주님은 항시 우리와 함께 계시게 됩니다. 그러니 너무 자책하지 말고 그럴수록 더욱 목소리 속의 목소리로 기도드리시기 바랍니다.
신의 조영 안에서 볼 때 모든 일은 사람을 보다 알차게 형성시켜 주기 위한 배려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갑게도 사람들은 그런 뜻을 귓등으로 듣고 말아 모처럼의 기회를 놓치고 맙니다. 수녀님, 예수님이 당한 수난에 비한다면 오늘 우리들이 겪는 일은 조그만 모래알에 미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옛 성인들은 오늘 우리들에게 큰 위로요 희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분 안에서 위로와 희망을 누리실 줄 믿습니다. 이번 길에 수녀원에서 하루 쉬면서 아침미사에 참레할 수 있었던 일을 무엇보다 뜻 깊게 생각합니다. 그 동네의 질서와 고요가 내 속뜰에까지 울려 왔습니다. 수녀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산에는 해질녘에 달맞이꽃이 피기 시작합니다. 참으로 겸손한 꽃입니다. 갓 피어난 꽃 앞에 서기가 조심스럽습니다. 심기일전하여 날이면 날마다 새날을 맞으시기 바랍니다. 그곳 광안리 자매들의 청안을 빕니다...`
왠지 제 자신에 대한 실망이 깊어져서 우울해 있는 요즘의 제게 스님의 이 글은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오고, 잔잔한 깨우침과 기쁨을 줍니다. 어느 해 여름, 노란 달맞이꽃이 바람 속에 솨아솨아 소리를 내며 피어나는 모습을 스님과 함께 지켜보던 불일암의 그 고요한 뜰을 그리워하며 무척 오랜만에 인사 올립니다. 이젠 주소도 모르는 강원도 산골짜기로 들어가신 데다가 난해한 흘림체인 제 글씨를 늘처럼 못마땅해 하시고 나무라실까 지레 걱정도 되어서 아예 접어 두고 지냈지요. 1977년 여름에 `구름 수녀에게`라고 적어서 보내 주신 아름다운 구름사진 소책자 <구름의 표정>은 아직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하늘의 구름들이 특이한 모양을 보일 때면 그 이름을 알기 위해 이 책을 뒤적이곤 한답니다.
스님, 언젠가 또 광안리에 오시어 이곳 여러 자매들과 스님의 표현대로 `현품 대조`도 하시고, 스님께 펼치시는 `맑고 향기롭게`의 청정한 이야기도 들려주시길 기대해 봅니다. 이곳은 바다가 가까우니 스님께서 좋아하시는 물미역도 많이 드릴테니까요. 항상 산에서 산처럼 살고 싶어하시는 스님께 제가 오늘 읽은 이창건 시인의 `산`이란 동시 한 편을 읊어 드리며 이 글을 맺습니다.
산은
높이만큼
뿌리도 깊다
세상을 겉으로 보기보다는
안으로 본다
그래서 가벼워 보이지 않는다
나무들이 잎을 더디 피우거나
풀벌레들이 눈을 늦게 떠도
조바심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