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할 땐 별이 되고 - 이해인
내가 꿈꾸는 문구점
다른 사람들에 비하면 외출의 범위가 극히 제한되어 있는 수도자의 신분이지만 내가 가장 자연스럽게 갈 수 있는 곳. 가보고 싶은 곳 중의 하나가 바로 문구점입니다. 문구점에 들를 때마다 나는 설레임을 감출 수 없고, 꿈꾸는 어린이가 되는 느낌입니다. 그 안에 들어서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을 때가 많기에 여유 없는 날은 아예 들어가는 것을 포기합니다. 바닷가 산책을 나갔다 오는 길에 종종 동네 문구점에 들러 예쁜 편지지, 메모지, 노트, 볼펜, 포장지들을 고르다 보면 노래라도 부르고 싶을 만큼 밝고 즐거운 마음이 됩니다. "아저씨, 크레용 주세요" "생일카드 있어요?" 하며 들어서는 어린 친구들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 또한 즐겁고, 열심히 물건을 챙겨 주는 주인의 친절한 표정과 손길을 바라보는 것도 즐거운 일입니다.
한 번은 내가 옛 친구와 함께 문구점에 가서 마음에 드는 편지지를 발견하고 하도 기뻐하니, 친구는 "그렇게 좋으니? 아직도 넌 소녀 모습 그대로구나" 하면서 열 묶음이나 사서 안겨 준 적도 있습니다. 그후에도 친구는 아름다운 편지지, 노트, 카드들을 사서 모아 두었다가 선물용으로 쓰라며 우편으로 보내 주곤 합니다. 전과 달리 요즘은 문구용품들도 매우 화려하고 고급스러워졌지만, 그래도 가장 부담 없고 실용적인 선물을 선택하려면 문구용품만큼 적절한 것이 없는 듯합니다.
우리 수녀원에서는 해마다 설날 아침에 여러 가지 문구용품을 세배값으로 줍니다. 커다란 소쿠리에 풀, 가위, 수첩, 색종이, 형광펜, 클립, 등등 온갖 다양한 품목들을 담아 장식해 두고 세배가 끝나면 각자 원하는 것 한 가지씩 갖는 것인데 환히 웃으며 문구용품들을 집어 가는 이들의 모습은 보기가 좋습니다. 나는 가끔 상상 속의 문구점 주인이 될 때가 있습니다. 가게 이름은 누구라도 들어와서 원하는 물품들뿐 아니라 기쁨과 희망과 사랑도 담아 가는 `누구라도 문구점` 이라 지으면 어떨까요? 실내에 항상 잔잔한 음악이 흐르게 하고 손님들이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에 계절에 어울리는 아름다운 시들을 걸어 두겠습니다. 공간이 그다지 넓지 않더라도 작은 책상과 걸상을 한 모퉁이에 마련하여 향기로운 들꽂을 꽂아 두고, 때때로 손님들이 한 잔의 차를 마시며 정다운 이들에게 편지나 카드를 쓸 수 있도록 배려하는 친절을 베풀겠습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그에게 필요한 선물 상담도 해주고 삶과 문학을 이야기하는 좋은 벗과 이웃이 되고 싶습니다. 물건을 만드는 사람들도, 그것을 팔거나 사용하는 사람들도 그 안에 사랑의 혼을 불어넣어야 빛이 나고 가치 있는 것임을 꼭 이야기해 주겠습니다. 또한 덮어놓고 새것만 선호하지 말고 작은 것이라도 자기가 이미 사용하는 물품들과 끝까지 길들이고 정들이며 좋은 친구가 되는 아름다움을 키워야 한다고 일러주겠습니다. 늘 내 서랍 속에서 쓰임 받기를 기다리며 조용히 웃고 있는 30년 된 색연필 한 다스와 묵직한 펀치, 그때그때 떠오르는 생각들을 적어 둔 사랑스럽고 오래된 수첩에 얽힌 추억에 대해서도 들려주겠습니다. 꼭 사야 할 물건이 없을 때라도 평소에 나눈 정 때문에 길을 가다가도 잠시 들렀다 갈 수 있는, 평범하지만 삶의 멋을 아는 성실한 단골손님들을 많이 만들어 가고 싶습니다.
누구라도 와서 함께 작은 기쁨을 나누는 작은 규모의 문구점을 이렇게 상상 속에 그려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나는 아직 쓰지 않은 새 노트들과 연필, 고운 카드와 편지지가 놓여 있는 우리방 선반에`누구라도 원하시면 가져가세요`라고 써 붙여 `누구라도 코너` 를 만들어 두니 옆의 자매들도 즐거워하고, 실제로도 기쁨을 파는 선물방의 주인이 된 듯 요즘은 더욱 풍요럽고 행복한 매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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