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할 땐 별이 되고 - 이해인
밝은 마음, 밝은 말씨
겨울의 주일 오후, 나의 자그만 방에서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밝은 햇빛을 온몸에 받고 앉아 있으면 행복합니다. 지난 몇 년 동안 어둡고 그늘진 지하의 방에 머물다가 얼마 전부터 햇볕이 잘 드는 방으로 옮겨 오니 나의 마음까지도 밝고 따스해지는 듯 기쁘고, 전에는 그저 무심히 받아 온 한 줌의 햇볕, 한 줄기의 햇살도 예사롭지 않은 큰 축복으로 여겨 집니다. 한 줄기의 따스한 햇살이 어둠을 밝게 해주고 추위를 녹여 주듯이 한마디의 따스한 햇살이 어둠을 밝게 해주고 추위를 녹여 주듯이 한마디의 따스한 말이 마음의 스산한 어둠을 밝혀 주고 고독의 추위를 녹여 준다는 사실을 오늘도 새롭게 기억하면서 또 한 번의 새해가 내게 내미는 하얀 종이 위에 나는 `밝은 마음, 밝은 말씨`라고 적어 봅니다.
요즘 내가 가장 부럽게 생각하는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밝은 표정, 밝은 말씨로 옆 사람까지도 밝은 분위기로 이끌어 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직접 만나거나 전화로 이야기를 나눌 때 한결같이 밝은 음성으로 정성스럽고 친절한 말씨를 쓰는 몇 사람의 친지를 알고 있습니다. 때로는 그가 몹시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음을 이쪽에서 훤히 알고 있는데도 여전히 밝고 고운 말씨를 듣게 되면 무슨 특별한 비결이라도 있느냐고 묻고 싶어지기도 합니다. 그러한 말은 마치 노래와 같은 울림으로 하루의 삶에 즐거움과 활기를 더해 주고 맑고 향기로운 여운으로 오래 기억됩니다. 상대가 비록 마음에 안 드는 말로 자신을 성가시게 할 때조차도 그라 무안하지 않도록 적당히 맞장구치며 성실한 인내를 다하는 이들을 보면 참으로 존경스럽습니다. 자기 자신의 기분보다는 오히려 상대방을 먼저 헤아리고 배려하는 사랑의 마음이 느껴지는 말씨, 이기심과는 거리가 먼 인정 가득한 말씨는 우리에게 언제나 감동을 줍니다.
자기가 속상하고 우울하고 화가 났다는 것을 핑계로 우리는 얼마나 자주 퉁명스럽고 불친절한 말씨로 주위의 사람들까지도 우울하고 힘들게 하는 경우가 많은지 모릅니다. 또한 다른 이들에게 충고한다고 하면서 얼마나 냉랭하고 모진 말로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주곤 하는지 이러한 잘못을 거듭해온 나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며 새삼 부끄러워집니다. 금방 후회할 줄 알면서도 생각 없이 말을 함부로 내뱉은 날은 내내 불안하고 잠자리도 편치 않음을 나는 여러 차례 경험하였습니다. 뜻 깊고 진지한 의미의 언어라기보다는 가볍고 충동적인 지껄임과 경박한 말놀음이 더 많이 난무하는 듯한 요즘 시대를 살아오면서 참으로 마음을 정화시켜 줄 고운 말, 밝은 말, 참된 말이 그리워집니다. 겉으로 긍정적인 것 같으면서도 보이지 않는 가시가 숨어 있거나 교묘한 위선의 그늘이 느껴지는 이중적이고 복잡한 말이 아닌 단순하고 투명한 말씨, 뒤가 없는 깨끗한 말씨를 듣고 싶습니다. 하느님 안에 우리가 어린이처럼 맑고 밝은 마음, 고운 마음을 지니며 살려고 노력한다면 매일 쓰는 말씨 또한 조금씩 더 맑고 밝고 고와지리라 믿습니다.
새해를 맞아 내가 늘 사랑의 빚을 지고 사는 친지들에게 자그만 선물이라도 보내고 싶어 두리번거리는 나에게 유리창을 뚫고 들어온 한 줄기 햇살이 가만히 속삭여 줍니다.
`친절한 말 한 마디가 값진 선물보다 더 낫지 않느냐? (집회서 18:17).`
잎사귀 명상
꽃이 지고 나면
비로소 잎사귀가 보인다
잎 가장자리 모양도
잎맥의 모양도
꽃보다 아름다운
시가 되어 살아온다
둥글게 길쭉하게
뾰족하게 넓적하게
내가 사귄사람들의
서로 다른 얼굴이
나무 위에서 웃고 있다
마주나기잎
어긋나기잎
돌려나기잎
무리지어나기잎
내가 사랑한 사람들의
서로 다른 운명이
삶의 나무 위에 무성하다
- 나의 시 `잎사귀 명상`
어느 날 나는 유심히 창 밖의 나뭇잎들을 바라보다가 이런 글을 적어 보았습니다. 우리 수녀원의 어느 수녀님이 계절이 바뀔 때마다 꽃이 아닌 나뭇잎들을 작은 화병에 꽂으며 기뻐하는 모습을 본 일이 있습니다. 얼마 전엔 내 옛 친구의 집을 방문했더니 어떤 화가의 여러 종류의 나뭇잎만을 소재로 한 그림달력이 벽에 걸려 있었는데, 어찌나 아름답던지 꼭 갖고 싶다는 말을 하려다 괜한 욕심인 듯싶어서 접어 두면서 방학숙제로 동생과 함께 열심히 여러 가지 나뭇잎들을 채집하던 어린 시절의 추억을 즐겁게 떠올려 보았습니다. 소나무, 참나무, 미루나무, 느티나무, 오동나무, 은행나무 등등, 나무들의 종류는 참 많기도 하고 흩잎, 겹잎, 마주나기잎 등 잎사귀의 종류도 많으며 윈형, 선형, 피침형, 마름모형 등 잎사귀의 모양 또한 매우 다양합니다. 우리가 나무들을 전체적으로 감상하거나 그 꽃과 열매에 눈길이 가긴 쉬워도 나무에 달린 잎사귀 자체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는 일은 적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가을이 되어 꽃도 열매도 다 떠나 보낸 뒤의 나무 위에서 바람에 한들대는 나뭇잎들의 모습은 쓸쓸하지만 아름답게 보입니다. 고운 낙엽 한 장을 주워 책갈피에 끼우는 마음도 문득, 잊고 있던 잎사귀에 대한 애정과 떠나가는 것에 대한 아쉬움과 그리움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길을 가다 보면 어쩌면 사람들의 모습이 저토록 다를까? 새삼 놀라게 되는 적이 있고, 공동체 안에서 살다 보면 함께 사는 이들의 너무 다른 성격과 기질에 거듭 놀라고 감탄할 때가 많습니다. 가까운 가족, 친지, 이웃들을 살펴봐도 글들이 걷는 삶의 길, 삶의 태도 역시 얼마나 다양한지 모릅니다. 누구나 한 번쯤 삶의 시작과 끝을 생각해 보는 가을. 어느 계절보다 가을을 사랑하는 나는 오늘 아침, 성당 유리창으로 비쳐 오는 상록수들의 푸른 그림자에 내 마을을 포개면서 문득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라는 나무뿌리에서 함께 그러나 서로 다르게 피어나 노래하고 기도하는 초록의 잎사귀들로 여겨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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