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끝기도를 끝내고 나의 긴 그림자를 끌고 오는 밤의 숲길에서 나무들이 나를 부르는 침묵의 소리. 짙은 향기를 남기며 사라지는 백합들의 마지막 노랫소리. 나무층계를 오르다가 문득 올려다본 하늘의 별. 나는 그만 황홀하여 갈 길을 잃고 말았네.
2
젊은 날 사랑의 뜨거움이 불볕 더위의 여름과 같을까. 여름 속에 가만히 실눈 뜨고 나를 내려다보던 가을이 속삭인다. 불볕처럼 타오르던 사랑도 끝내는 서늘하고 담담한 바람이 되어야 한다고 - 눈먼 열정에서 풀려나야 무엇이든 제대로 볼 수 있고. 욕심을 버려야 참으로 맑고 자유로운 사랑을 할 수 있다고 - 어서 바람 부는 가을숲으로 들어가자고 한다.
3
가을엔 바람도 하늘빛이다.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주고받는 말들도 기도의 말들도 모두 너무 투명해서 두려운 가을빛이다. 들국화와 억새풀이 바람 속에 그리움을 풀어헤친 언덕길에서 우린 모두 말을 아끼며 깊어지고 싶다. 가을 하늘에 조용히 떠다니는 한 조각의 구름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