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이야기 2 - 정채봉, 류시화 엮음
2. 잊을 수 없는 사람
항상 깨끗하게 공정하게 하라 - 차범근
축구 선수들에게 '벤치'는 정말 달갑지 않은 곳이다. 아무리 후보 선수라고 해도 자신의 능력이 모자라 경기장에 못 나간다고 스스로 인정하는 선수는 거의 없기 때문이고 감독들에게 있어서 벤치는 늘 '문제의 소굴'이기도 하다. 내가 선수 생활을 마치고 지도자의 길로 들어설 때, 지금은 FIFA(세계축구연맹)의 기술위원장을 맡고 계신 전 네덜란드 대표팀 감독 리누스 미쉘 선생님의 말씀하셨다.
"선수 관리는 항상 깨끗하고 공정하게 하라."
이것이 안되면 감독은 결국 자신의 무덤을 파게 되는 것이라고 그분은 거듭 일러주셨다. 귀국해서 프로팀을 맡았을 때, 기득권을 가진 선수들에 대한 배려 없이 과감하게 능력대로 선수 선발을 시도했다. 한국 축구의 질적 향상과 젊은 선수들에 대한 동기 부여로 활기를 주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하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내가 노장인데..." "내가 국가대표 선수인데..."하는 기득권층의 반항은 생각보다 거셌다. 그러난 2년 정도 지나자 "우리 선생님은 선수를 기용하는 것만큼은 확실하다"는 얘기가 선수들 사이에서 술술 나오는 것 같았다. 보잘것없이 보이는 집단이라 할지라도 지도자가 공정성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미쉘 선생님의 충고. 지금도 나에게는 변할 수 없는 윈칙이다.
(한국 월드컵축구 대표팀 감독)
훌륭한 연기는 인격이 앞선다. - 안성기
지난 80년대는 내게 여러모로 행운을 가져다 준 시기였다. 지금의 내 아내와 결혼하여 가정도 꾸몄고, 전에 없이 좋은 영화들을 만날 수 있었던 덕택에 굵직한 상도 몇 개 맏았으며 차츰 영화인으로 자리를 잡을 수 있던 때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 나의 마음속에는 '과연 훌륭한 배우는 어떤 배우일까'하는 물음이 생겼고, 해답을 찾지 못한 채 나는 방황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느 날 나는 우연한 기회로 답을 찾을 수 있었다. 당시 나는 최인호 형의 원작인 (깊고 푸른 밤)에 캐스팅 되어 촬영을 하고 있었다. 여관방에서 밤새 시나리오 작업을 하는 감독과 형에게 가끔 먹을 것을 사 들고 가서 일돋 도와 주고 이야기도 나누었는데, 내 마음을 읽었는지 최인호 형이 내게 이렇게 물었다.
"모든 일에 있어서 기술적인 것보다는 인격적인 것이 앞선다고 생각해. 영화도 마찬가지야. 좋은 사람이 좋은 연기를 하고 좋은 영화도 만들 수 있는 거지."
바로 그 말이 내게 해답을 주었다. 육체와 마음이 건강해야 살아 있는 연기를 할 수 있고 그렇게 함으로써 작품을 빛낼 수 있는 것이다. 훌륭한 인격자가 바로 훌륭한 배우의 밑거름이라는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해준 말이었다.
(영화배우)
덮개를 걷고 홀로 서기 - 이창호
'천재 소년 기사' '홍안의 승부사' '무서운 10대'... 내 이름 앞에는 늘상 과분한 별칭이 붙어 다닌다. 어려서 바둑계에 입문한 탓인지 선배님들 곁에서 가르침도 많이 받았고, 그래서 '승부의 세계'에 발을 디뎠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마음 고생 한 번 하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그만큼 그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지내 온 것도 사실이다. 대부분 따뜻한 관심이긴 하지만, 어쩌면 그것이 내 자생력을 더디게 하는 벽이 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제는 비록 따뜻한 덮게일망정, 그것을 조심스레 걷어내야 할 때가 아닌다 싶다.
그 제일보로, 초등학교 2학년이던 코흘리개 꼬마를 제자로 거두어 바둑의 묘미를 일러주신 스승님 곁을 떠나 홀로 설 결심을 하고 있다. 아직은 기량도 힘도 부족하지만, 오로지 땅에 디딘 내 두 발을 버팀목 삼아 우뚝 서려고 한다. 그리하여 국내 바둑계뿐만 아니라 세계 바둑의 아성을 한 귀퉁이라도 '기사 이창호'의 이름으로 허물고 싶다. 스승님께선 허허 웃으시며 이렇게 말씀하실 것이다.
"이제야 너와의 싸움을 시작했구나. 너를 이겨야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거란다."
(바둑 기사)
필름에 세상의 참모습을 - 변영주
내가 영화에 미치게 된 것은 순전히 아버지 때문이다. 영화광이었던 아버지 덕분에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그때 내가 본 영화들은 대부분 프란츠 랑, 데이비드 린, 존 포드의 작품들이었다. 본격적으로 영화 제작에 관여하게 된 것은 4학년 때였는데, 나는 주로 여성을 주제로 한 기록 영화를 만들었다. 아이를 맡길 곳이 없어 마음놓고 일할 수 없는 어느 산동넨 아주머니, 자신의 꿈을 잃어버린 성폭력 피해자, 일본인 관광객을 상대로 웃음을 파는 매춘부들... 최근엔 강제 종군위안부로 고향 땅에도 가보지 못하고 임종을 맞이하는 정신대 할머니들의 삶을 필름에 기록했다. 첫 시사회 때 할머니들은 "이젠 죽어도 여한이 없다. 이 영화 속에 우리가 살아 있으니"라고 하시며 모처럼 즐겁게 웃으셨다. 영화는 현실의 반영이라고 믿는 나에게 기록 영화는 이처럼 너무도 소중한 가치를 지닌다. 나는 영화를 통해 세상을 바꿀 수 있기를 꿈꾼다. 여성이란 이름으로, 정의란 이름으로, 그리고 자유와 평등이란 이름으로,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 그리고 '돈 못 버는 삼류 감독'이라고 흉을 보시지만 어려울 땐 가장 든든한 후견인이 되어 주시는 아버지의 뜻에 보답하기 위해, 오늘도 나의 두 눈은 카메라의 뷰파인더로 향한다.
(영화감독)
@f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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