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7년 이화여고 3학년 시절, 진학을 준비하는 다른 등기들과는 달리 나는 형편상 직장을 구해야만 했다. 그때 마침 카이스트(KAIST)에서 여성 인력을 뽑는다는 추천장이 학교로 들어왔다. 선생님의 추천을 받아 열 명 정도 면접을 보았는데, 첫 취업 관문에서 나는 낙방의 고배를 마셨다. 삶에 대한 실망과 회의로 갈등의 나날이 흘러가고 있었다. 그때 내 사정을 안 친구 혜경이가 곁으로 다가오더니 말했다.
"시청에서 공무원 공채를 한대. 너도 한 번 해봐."
그러면서 시험 원서와 한법, 행정법 등의 책을 내놓는 것이었다. 혜경이는 초등학교 때부터 줄곧 단짝인 친구였다. 1968년 서울시 9급 국립 공채에 합격해 내가 첫 발령을 받은 곳은 성북구 동소문 동사무소였다. 서너 달 근무를 하는 동안 남성 위주의 조직 체계로 일관된 우리 나라의 공무 체게로 인해 내게는 갈등이 찾아왔다. 내가 아는 한 분은 금성사에 자리가 있다며 입사를 권했다. 선택의 기로에서 고민하고 있을 때 다시 혜경이를 만났다.
"글쎄. 내 생각엔 기업에서 일한다는 건 개인(사장)의 이익 추구를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 같아. 하지만 공무원은 시민 전체를 위한 것이면서 또 너 자신을 위한 일이기도 하잖니. 어느것이 인생에 더 큰 보람이겠니?"
그후에도 직장 생활의 어려움은 어김없이 내게로 찾아들었다. 하지만 남성에게 결코 뒤떨어지지 않으리라는 각오로 버거운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친구 혜경이의 말이 내가 뒤로 물러서지 않는데 큰 힘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서울시청 첫 여성 감사 담당관)
길이 아니면 가지 말라 - 김영섭
저문 날의 문턱에 서서 젊은 날을 회상한다는 것은 바쁜 일상을 떠나 잠시 여유를 갖는 일이다. 하지만, 내 경우는 젊은 날의 초상이 장밋빛으로 채워진 것은 아니어서 한 마디로 젊은 날이 좋았다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나는 서울의 모 법과대학을 다닐 때 박정희 씨의 대통령 3선 출마를 위한 개헌안에 반대 운동을 하다가 용공 혐의로 수배받은 적이 있었다. 결국 경찰에 자진 출두하였지만 어린 나이에 데모 주동을 한 탓에 배후를캐려는 혹독한 조사를 받게 되었고 학교에서는 정학 처분이 내려졌다. 그 시련의 시간에 나는 학업을 중지하고 모 무역회사 디자인실에 취직하게 되었다. 그후 2년 뒤 전공을 바꾸어 신설된 성균관대학교 건축공학과에 제1회 학생으로 입학하였다. 대학을 다니면서 가정 사정으로 야간에는 회사에 다니는 생활을 4학년 때까지 계속했고 학교의 서클 활동에도 열심히었다. 그때 나의 은사님은 지금은 고인이 되신 윤일주 교수님이셨다. 당시 학회장이었더 내가 다방면의 일에 관심을 갖고 생활하는 것을 보고 그분은 이렇게 타이르셨다.
"자기 길이 아니면 가지 말라."
이 말씀은 내가 학교를 졸업하고 여러 갈래의 길이 내 앞에 펼쳐졌을 때 하나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평생의 교훈이 되었다. 고생스러운 건축가의 길을 선택하고 나서 흔들릴 때마다 나는 돌아가신 선생님의 그 말씀을 떠올리며 다시 중심을 잡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