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가 쏟아지는 우리선인들 이야기
버젓하게 배짱도 좀 있어야
조선의 말엽을 흔히 구한말이라고 하였고 그당시 연안 김씨 명문가에 김사철이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그에 얽힌 이야기다. 아버지가 동지돈녕부시를 지냈으며 외숙이 뒤에 영의정을 두 번이나 한 홍순목이니, 우정국의 초대국장으로 있으면서 김옥균 등과 갑신정변을 꾸몄다가 실패해 죽은 홍영식과는 내외종간이 된다. 높은 벼슬을 했으면서도 청렴했든지 아버지를 여의어 수입의 줄이 끊기자 생계는 매우 곤란하여 낙원동 납작한 초가집에서 어머니가 바느질 품을 팔아서 지냈는데, 뛰어난 천품을 지닌 그를 눈여겨 보고, 사실상 생계는 그의 외숙이 대주고 있는 실정이었다. 당시 이른바 양반 가문에서 출세와 성공의 길은 공부하여 과거에 급제하는 것 뿐이라, 이 김사철 소년도 바깥출입을 않고 밤낮없이 틀어박혀 글공부에 온힘을 쏟았다. 그러던 어느 하루 사람을 찾는 소리가 났다.
“하님 아뢰오.”
그 당시 점잖은 분이 남의 집을 심방하면 대문 밖에서 목청을 높여, “이리오너라!” 하고 긴 소리로 하인 부르는 구호를 외고 하인이 있으면 득달같이 달려나간다지만 그러지 못하고 주인 여자 혼자 있든지 하면,
“아무도 아니 계신다고 여쭈어라.”
이 역시 중간에 하인이 있는 양으로 하여, 간접적으로 응대를 하는 것이 법이었다. 그러나 주인댁 대감의 심부름으로 온 하인쯤 되면 그 식으로는 안 통한다.
“하님, 아뢰오.”
하님이란 남의 집 하인에 대한 존칭이다. 김소년은 보던 책에서 눈을 떼고 물었다.
“거 누구냐?”
“예! 도련님 혼자 계시구먼입쇼. 가회동서 양식하고 나무바리를 가져왔사와요.”
도령은 훤칠한 키에 벌떡 일어서며 가뜩이나 부리부리한 눈을 화경같이 떴다.
“뭐야? 이놈! 그래 김사철이가 외갓집에서 내주지 않으면 못 산다더냐? 낼름 도로 가져가거라. 고연놈 같으니.”
하인은 까닭없는 호령만 듣고 기가 죽어서 돌아갔다. 저녁때 나들이에서 돌아온 어머니는 부엌을 들여다 보아 여전히 횡뎅그레한 걸 보고 아들에게 물었다.
“낮에 가회동서 무얼 보내오지 않았든?”
“뭔가 실려 보냈기에 호통을 쳐서 쫓아 보냈지요. 그래 우리가 외갓집 그늘 아니면 못 산단 말씀이에요?”
이튿날 아들이 글읽기에 골몰해 있는 사이 어머니는 친정을 찾았다.
“왜 하필 걔가 있을 때 보내셨어요? 그 애 성미가 그런 줄 아시면서...”
그런 뒤로 시량은 도령 없을 때만 전해지고, 그러는 사이 공부는 점점 숙달해 깊어져 갔다. 그러던 어느 날 외가에서 전갈이 왔다. 정부 안에서 한가닥하는 외숙이 부른 것이다.
“너 이번에 과거를 봐라. 내가 시관이 됐느니라.”
그러나 대답은 또한번 뜻밖이었다.
“싫어요, 내 힘으로 버젓하게 하지, 왜 외숙 덕에 했다는 말을 듣게 해요?”
대감은 성숙한 생질의 어엿한 대답을 듣고, 다시 더 뭐라 말을 잇지 못하였다. 그런데 돌아온 김소년은 엉뚱한 길을 택하였다. 과거에는 제술이라 하여 글을 지어 올리는 길이 있고, 유학의 경전을 외우고 해설하는 강경과가 있는데 후자를 택한 것이다. 당시 제술에는 차작(남의 글)을 받는 등 버젓하게 부정이 행해졌는데, 강경이라고 협잡이 없을까마는, 이것은 본인이 직접 나와 여러 시관 앞에서 당당하게 강론하는 것이라 그 길을 택한 것이다. 과장에 들어선 그는 먼저 정해진 순서대로 시관석을 향해 읍하여 경의를 표하고 거기 마련된 대통에서 첨자를 뽑아 얼핏 보고 대령한 서리에게 넘겼다. 거기엔 경전 중에 나온 글귀의 머리글 몇 자가 씌어 있는 것이다. 시관이 대쪽을 받아 탁자에 놓자, 그는 청산유수로 그 대목을 암송하고 거기 대한 주석을 거침없이 해 내려갔으며 시관들 사이에서는 귓속말이 오갔다.
“야! 녀석 끌밋하게 잘도 생겼다. 언변도 좋고... 못보던 이름인데 누구야?”
“누군 누구야? 홍판서 생질이지.”
“그랴?”
과거는 순조롭게 합격이 되었다. 물론 외숙의 이름이 작용하였겠건만, 당자의 태도는 버젓했다.
“당당하게 내 힘으로 하지, 왜 외숙의 힘을 입어?”
이리하여 당당히 합격한 김급제의 벼슬길은 순조롭게 트여 여러 요직을 두루 거치고 외직으로 선산 도호부사로 나갔을 때 일이다. 하루는 점잖게 생긴 늙은 백성 하나가 잡혀 들어왔는데 참혹해서 바로 보지 못하겠다. 무어 차림새가 초라한 것이 아니라, 눈은 초점을 잃고 전신을 후들후들 떠는데 아래웃니의 딱딱딱 부딪치는 소리가 곁에까지 들린다.
“원죄로구나.”
김부사는 늙은이의 태도에서 억울하게 들어왔다는 것을 직감하였다. 죄목을 물으니 볼썽사납게도 늙은이가 며느리와 붙었다는 것이다. 우선 방 하나를 치워서 들여앉히고, 나이 든 기생을 불렀다.
“영감을 잘 모셔야 한다. 잘못하면 자결할지도 모르는데 그렇게 되면 네년 모가지를 그냥두지 않을 테다.”
기생은 소합원을 달여먹여 노인을 안정시키고 돌봤으며, 부사는 눈치빠르고 믿을 만한 포교를 동원해 뒷조사를 일렀다. 아니나다를까, 노인의 재산을 탐내 못된 놈들이 조작해 낸것임이 낱낱이 드러났다. 그래 노인을 의관시켜서 곁에 앉히고 좌기를 차렸으니 요새로 치면 법정을 마련한 것이라. 일 꾸민 놈들을 오라지어 꿇리고, 그 사이 조사한 것을 읽어서 들려준 뒤 모두 사실임을 승복하는 다짐을 받았다.
“이제 나라에 품하여 물고를 낼 것이요. 그동안 네놈들의 목숨은 내가 맡아둔다.”
노인은 눈물 콧물로 범벅이 되어 일어날 수도 없이 절을 했다.
“그런 몹쓸 누명을 쓰고는 정말 죽을래야 죽을 수도 없었사옵니다. 사또!”
임기를 마치고 돌아온 뒤로, 노인은 줌안에 든 베, 모시와 명주를 바리로 실어 춘추로 보내 나귀째 두고 가기를 죽는 날까지 하였고, 김사철은 그것으로 살림을 일으켜 또다시 버젓하게 조정에 서서 높은 벼슬을 두루 하고, 합방이 된 뒤에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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