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가 끝나고 아쉬운 마음으로 귀대길에 올랐다. 어머니가 정성들여 싸주신 떡 보따리를 들고서였다.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휴가를 다녀오는 사람은 떡을 해오는 게 우리 부대의 전통으로 되어 있다. 아직 이 전통을 어긴 사람은 한 명도 없었으며, 휴가 떡으로 즐거운 잔치가 벌어지곤 했다. 귀대길 버스 속에서 우연히 고등학교 동창을 만났다. 버스가 어느 소읍에서 잠시 정차하는 틈에 녀석은 내려서 술로 회포를 풀자고 했다. 나는 옆자리에 있는 중학생에게 휴가 떡을 맡기고 내렸다. 무슨 이야기가 그리 많았던지 정류장으로 돌아왔을 땐 버스가 이미 떠난 뒤였다. 휴가 떡을 잃었으니 큰일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여기고 쓸쓸한 마음으로 귀대해야만 했다. 그런 뒤 열흘이나 됐을까, 무거운 소포가 왔다. 그 속엔 떡과 편지가 들어 있었다.
(아저씨, 죄송하게 됐군요. 시간이 있었다면 그때 기다리는 던데. 할 수 없이 아저씨 떡은 동생 생일 잔치에 썼습니다. 대신 엄마가 하신 떡을 보내 드리니 나눠 드세요. 거기는 해변이죠? 저는 바다를 좋아해요. 한 번 놀러 가고 싶은데 괜찮을지 모르겠어요.)
순간 가슴이 따뜻해져 왔다. 그 뒤, 나는 틈나는 대로 조개껍질을 주워 모아 조그마한 거울을 만들었다. 작은 정성이나마 보답하고자 하는 뜻에서였다. (전북 고창군 경찰초소 근무)
돌아온 만년필 - 김동욱
몇 해 전 일본에 갔을 때였다. 기차 앞 좌석에 걸어 둔 채 잊고 내린 애용품 애작타 카메라가 고스란히 도쿄역 분실물 보관소에 도착해 있었다. 또 교토 역에서 나라핼 열차를 바꿔 탔을 때도 바바리 코트를 열차에 놓고 내렸었다. 바로 신고를 했더니 한 시간도 못돼 오사카 쪽에서 오는 기차편으로 고스란히 되돌아왔다. 이 두 사실을 경험하고서 나는 일본의 저력이 무엇인가를 느꼈다. 나는 옆에 있는 일본인들이 "꼭 돌아올 겁니다"하고 그 돌아올 것을 의심하지 않는 모습이 부러웠다. 그런데 이번에 나는 우리 나라에서도 같은 경험을 했다. 수안보 온천에 갔을 때의 일이다. 청주에서 한두 시간쯤 가면 닿는 수안보 온천은 조용하고 아담한 곳이었다. 우리는 주말을 피해서 갔기 때문에 복잡한 인파에 시달리지 않고 온천 여행의 서정미를 맘껏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이튿날 수안보 온천을 떠나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나는 만년필 꾸러미를 호텔에 놓고 온 것을 깨달았다. 파카 65에 크로스 볼펜 두 자루, 파카 볼펜 한 자루, 노트 한 권, 가격으로 치면 얼마 안되지만 7~8년 동안 애용하던 만년필을 잃어버리고 나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래도 한 가닥 희망을 걸고 집에 와서, 만년필 등을 놓고 왔으니 보관 바란다는 내용의 전보를 쳤다. 그러나 아무런 회답이 없었다. 물론 보관을 바란다고 했으니 회답이 있을 리 없었다. 한 열흘 지나 나는 다시 편지를 썼다. (값으로 따지면 얼마 되지 않는 것이지만 우리 같은 사람에게는 소중한 물건이니 소포로 보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보름이 지났다. 하루는 학교에 나가 보니 소포가 와 있었다. 노트와 만년필, 볼펜 세 자루가 그대로 담겨 있었다.
(연세대 문과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