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이야기 2 - 정채봉, 류시화 엮음
1. 평범한 행복 2
휠체어를 탄 농구 감독 - 박몽구
1982년 초겨울, 거울같이 맑은 빙판이 두껍게 깔린 동대문 실내 링크에서는 한 무리의 젊은이들이 연습 경기에 눈코 뜰 새 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링크 밖 스탠드에 앉아 지켜보는 코치며 관전자들이 두꺼운 방한 파카 따위를 걸치고 있는데 비해, 빙판을 종횡무진으로 누비는 연세대 선수들의 땀에 젖은 얇은 유니폼에서는 연방 허연 김이 피어 오르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팽팽한 열기에 찬물을 끼얹기라도 하는 듯 '쿵'하는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한 팀의 중심 공격수인 센터를 맡아 번개같이 뛰던 이성근 선수(25세)가 그만 펜스에 꽝 부딪힌 것이다. 동료들이 우르르 몰려와 그를 세브란스 병원으로 옮겼다. 병원으로 옮겨진 이 선수는 부랴부랴 수술을 받았다. 그리고 두달 동안 병상에 묶인 채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밤낮 진통제로도 역제하기 어려운 아픔이 온몸을 뒤척이게 했으나, 그 고통 속에서도 빙판을 신나게 지치고 있을 친구들을 생각하며 다시 일어서서 멋진 슛을 날리리라는 기대로 꾹 참았다. 만 두 달이 되어서야 허리를 꼭 묶은 코르셋을 풀어 내고 '앉는 연습'을 시작했다.
"아야, 허리에 바위가 얹힌 것 같아!"
걱정스레 지켜보시던 어머니 앞에서 허리를 일으키려던 이 선수는 무진 애를 써보았지만 겨우 15도밖에 구부리지 못했다. 이렇게 해서 바로 앉는 데만도 보름이나 걸렸다. 누구보다 활기차게 경기장을 쏘다니던 아이스하키 선수에게 그건 너무나 가혹한 시련이었다. 친구들의 휘파람을 날리며 빙판 위를 신나게 달릴 걸 생각하면 부러움으로 가슴이 미어지는 듯했다. 하지만 그 정도의 아픔은 서막에 불과했다. 친구의 등에 엎혀 물리치료를 받으러 다니던 어느 날, 문득 헐렁한 환자복을 들쳐 본 이 선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운동으로 잘 다져졌던 근육질의 두 다리가 '아프리카 난민'의 그것처럼 너무나 말라 있었던 것이다.
"꼬집어도 꼬집어도 아프지 않은 거예요. 내 다리가 왜 이러느냐고 의사 선생님께 대들었죠."
눈물로 만류하는 어머니 조돈숙 씨(63세)의 팔에 안겨 겨우 흥분을 감추자, 의사는 자초지종을 털어놓았다. 흉추 열한 번째 마디가 삭아 무너지면서 중추신경이 끈기고 하체가 마비되었다는 것이다. 잠이 오지 않아 말똥말똥 몇 밤을 지샜는지 모른다. 그런 때면 친구들을 시켜 술을 사다가 몰래 마시기도 했다. 친구들은 이 부탁에 처음에는 난감해 하다가 그가 조금만 화를 내도 이내 시키는 대로 했다. 회복기의 환자에게 술은 극약이나 다름없음은 물론이었다.
"좋은 친구인가 아닌가를 알려면 한 석 달쯤만 병원에 누워 있어 봐야 한다는 걸 그때 비로소 알았죠."
때로는 약까지 몰래 버리며 자포자기하던 그에게 한 친구가 나타났다.
"그래 너는 널 잘 봤어. 넌 살 가치가 없는 놈이야. 정 죽고 싶음 이걸 먹어!"
정말이지 가슴이 오싹했다. 친구 녀석이 그렇게 매정해 보이고 야속할 수가 없었다. 1983년 어느 봄날 그는 친구가 준 약봉지를 품에 앉고, 가까스로 휠체어에 의지하여 병원 뒤의 숲으로 들어갔다. 몸을 던지기에 안성마춤인 가파른 언덕을 찾아서...
"그런데 참 이상하대요. 막상 모종의 결심으로 산속으로 갔는데, 막 파릇파릇 피어나는 새싹들을 보니 눈물이 핑 돌면서 세상은 참 아름답구나 하는 생각이 물컹 드는 거예요."
그는 그때부터 술을 일체 멀리하고 열심히 치료했다. 그리고 보통 사람들의 발보다 더 편하도록 휠체어 타기를 연습했다. 때로는 온몸이 땀으로 젖기도 했지만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다. 마침내 1983년 말 15개월 동안의 병원 생활 끝에 퇴원하여, 연세대 체육과에서는 처음으로 아니 아마도 국내에서는 최초로 1986년 봄 장애인으로서 체육학과를 졸업할 수 있었다. 그해 8월 30일 장충체육관에서는 전국 장애인 농구대회가 열렸다. 오후가 되어 홀트아동복지회 농구팀과 삼육재활원 농구팀 간의 마지막 결승 경기. 슛이 터질 때마다 관람석에서는 박수가 터져나왔다. 그런데 한 가지 재미있는 일은 대개 한 팀만을 일방적으로 응원하는 다른 경기와는 달리, 온 관중이 하나가 되어 아느 팀이건 슛이 터질 때마다 격려의 박수를 아끼지 않는 것이었다. 선수들의 몸놀림은 거추장스런 휠체어나 장애는 까맣게 잊은 듯 그지없이 빨랐다. 마침내 삼육재활원 팀이 34: 32로 가까스로 승리를 하였고 이제 곧 시상식이 있을 참이었다.
"다음은 지도자상 시상이 있겠습니다."
모든 사람들의 눈이 집중된 가운데, 시상대 앞으로 휠체어를 타고 조심스럽게 나오는 사람, 그는 다름아닌 2, 3년 전까지 빙판에서 뛰어난 기량을 자랑하던 이성근 선수였다. 연세대 체육학과를 마치면서 당당히 교사 자격증을 딴 이 군은 장애자들의 요람인 삼육재활원에 교사로 몸담았던 것. 오늘도 이 교사는 누구의 힘도 빌리지 않고 이곳 삼육재활원 체육관으로 출근해 새싹들에게 탐스런 희망을 꽃피워 주고 있다. 그 자신이 그런 과정을 거쳐 왔지만 제자들에게 하는 말은 단 한 가지.
"아픔도 상처도 언제까지나 그 자리에 머물러 있다고 생각지 말아라.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에 몰두하다 보면 오느새 잊혀지고 새 사람이 되니까!" (샘터 부장)
일어나고 말리라 - 최병철
"장난 그만하고 어서 일어나거라. 학교 시간 늦을라."
어머님의 말씀이었다. 양 어깨에 가방을 메고 마루 디딤돌 밑 봉당을 뛰어 내려가다가 폭 고꾸라진 나. 몸과 사지가 꼼짝달싹도 하지 않는다. 교동 초등학교 5학년 6월 초, 안방으로 들어 온 나는 눈동자만 살아 움직일 뿐 고개 못 가눈 채 누워 있었다. 바람을 맞았다느니 중풍을 맞았다느니 소아마비라느니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집안 어른들, 친지들이 문병 오셨다. 또 각기 나름대로 장안의 명의를 소개해 주셨다. 최고 하루에 열네 분의 주치의가 나를 주무르고 침 놓고 주사 놓고 약 먹이고 하였을 뿐 아니라, 각기 나를 혼자만 돌보는 주치의처럼 철저하게 돌보는 조치가 취해졌음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다만, 시간차 치료를 받는 나는 처참하게 만신창이가 된 채 어떤 한 의사에게는 한 번에 백 대가 넘는 침을 두어 달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맞은 적도 있다. 곁들여 여러 가지 뜸질, 찜질, 한증, 심지어는 무꾸리, 박수무당굿마저도 좋다면 기꺼이 치러 내신 내 어머님께서는 그 하루하루를 어떻게 보내셨을까? 그런 가운데서도 어머님께서는 틈틈이 내 팔과 다리를 움직여 주시고, 혈액 순환을 돕는 마사지를 게을리하지 않으셨다.
만 1년이 지난 어느 날, 나의 엄지손가락이 미동하는 것을 발견하신 어머님의 세심한 관찰력이 아니었더라면 나는 영영 버려진 존재가 되고 말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함께 뛰놀던 학교 대표 축구팀 친구들이 문병 오면 나는 눈을 감은 채 그들을 맞이하곤 했다. 어느 날 그들은 전국대회 우승기를 가지고 나를 찾아왔다. 그들이 돌아간 뒤 나는 '반드시 일어나고 말리라'고 내 자신에게 수없이 말하고, 말하면서 울었다. 내 말이 드디어 나를 움직이게 한 것이었을까? 이듬해 얼음이 풀리듯 내 몸도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 내가 다시 학교에 나가게 된 첫날은 너무도 감격스러운 날이었다. 첫 걸음마를 하는 돌쟁이처럼 몇 걸음 발을 떼다가는 쓰러지고 또다시 일어나기를 몇 수십 차례를 거듭했을까? 부축하는 사람도 모두 떼어 놓은 채 서너 시간을 걸려 약 2킬로미터를 갔다. 너무도 신기했다. 그 벅찬 감격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교장 선생님께서는 반겨 주셨지만 그러나 친구들은 모두 졸업하고 없었다. 한국전쟁은 우리 집을 극빈 상태로 몰아넣었다. 겨우 걸어 다니는 주제에 여덟 식구의 생계를 짊어지게 되었다. 연년생인 형님은 늑막염으로 고생하시던 때였고, 할머님, 홀어머님, 남동생 하나, 막내 젖먹이를 포함하여 밑으로 여동생이 셋이나 있었다. 수수로 죽을 쑤어 두어 끼 먹은 날은 포식한 닐이었고, 푸성귀를 삶아 먹기도 쉽지 않았다. 어머님과 우리 육남매의 피나는 노력과 협조로 형님을 이어, 다음해인 1960년에 서울음대 작곡과를 졸업할 수 있었다. 피아노를 연습하면 손가락 운동이 되고, 걷는 것으로 다리 운동을 했기에 고등학교와 대학을 거치는 동안 남한 각처의 크고 작은 산들 중 안 가본 곳이 없게끔 됐다. 나의 아주 어릴 적부터 꿈이었던 음악 공부는 고생하신 어머님을 감동시켜 드리는 은혜의 보답이기도 했다. 나는 마음의 고향으로 깊이깊이 파고들어 갔다. '실존의 비약' 즉, 나의 외로운 투쟁과 엄청난 시련을 딛고 일어선 내적 희열을 악보에 담아냈다. 그리하여, 제1회 동아 음악 경연대회에서 작곡부 수석상을 타기에 이르렀다. (가톨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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