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이야기 2 - 정채봉, 류시화 엮음
1. 평범한 행복 2
처마 밑에서 - 황영자
버스에서 내려 바쁘게 결음을 재촉하는데 갑자기 한두 방울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잔뜩 찌푸렸던 하늘이 드디어 비를 뿌리기 시작한 것이다. 금세 빗줄기는 굵어지기 시작했고, 나는 좁은 골목길을 뛰어가면서 어디 비 피할 곳이 없는지 두리번거렸다. 그때 마침 한 허름한 집의 처마 밑이 눈이 들어왔다. 기와 지붕에 슬레이트로 처마를 만든 곳이었다. 나는 두고 볼 것 없이 그 처마 밑으로 뛰어들어 갔다. 빗줄기는 점점 거세어지고, 블럭이 깔린 길에는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면서 빗방울 꽃을 만들었다. 겨우 한숨을 돌리고난 뒤 가만히 보니 이 처마 밑에 먼저 들어온 손님이 있었다. 초등학교 2학년쯤 돼 보이는 꼬마 두 명이 비를 피해 한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머리보다, 아니 몸에 비해 너무 크게 보이는 책가방을 맨 채 비 맞고 들어와 있는 꼬마들의 모습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잠시 후 과일 파는 아주머니가 처마 밑으로 들어오고, 반대편에서 신문배달하는 소년이 다급하게 뛰어들어왔다. 처마 밑의 넓지 않은 공간은 순식간에 비를 피해 몰려든 사람들의피난처로 바뀌었다. 먼저 들어와 자리잡은 사람들은 점점 좁아지는 불편함을 느끼기도 했지만 나중 들어온 사람들을 보면서 덜 젖은 자기 자신에 대해 위안을 얻기도 했다.
계속되는 거센 비 때문에 집에 갈 일이 걱정 되어선지 두 꼬마는 잔뜩 긴장한 채 염려하고 있었다.나는 아이들을 좀 편안하게 해주려고 "얘들아, 너무 걱정하지 마라. 이런 소낙비는 곧 그치는 법이란다" 하고 말했다. 하지만 그 말을 하고 난 후 나는 금방 후회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내 말이 끝나자마자 갑자기 천둥, 번개가 치면서 더욱 거세게 비가 쏟아지는 게 아닌가. 마치 내 예언을 일부러 비웃기라도 하듯이... 말없이 긴장해 있던 아이들도, 비만 탓하며 하늘을 쳐다보던 아주머니도, 나의 몇 초 앞도 내다보지 못한 엉터리 예언에 웃음을 터뜨렸다. 나도 어이없어 웃음이 나왔다. 신문배달 소년도 내 눈치를 보면서 웃음을 참다가 따라 웃었다. 그때 누가 지나갔더라면 이상하게 생각할 만큼 처마 밑 사람들 모두가 한바탕 웃음을 웃었다. 그리고나서 처마 밑에선 아주 재미있는 풍경이 벌어졌다. 과일 파는 아주머니가 몇 개 안 남았다면서 복숭아를 한 개씩 꺼내 주셨고, 신문배달하는 소년은 남은 신문지를 가져다 갈고 앉으라고 내주었다. 꼬마들은 신문지로 모자를 접었다. 과일 아주머니가 이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느냐고 하면서 꼬마들에게 아무 노래나 하나씩 부르라고 했다. 망설이던 아이들은 둘이 의논한 뒤 (퐁당퐁당) 이란 노래를 마치 학예회에서 발표를 하듯이 불렀다.
비는 언제부터인가 관심 밖으로 사라졌고 처마 밑 분위기는 모두 한마음으로 따뜻하게 자연스러워졌다. 장대비 같은 빗줄기 때문인지 지나가는 사람도 하나 없는 골목길, 한 허름한 처마 밑에서 다섯 사람의 특설 무대가 마련된 듯했다. 바로 앞집은 새로 지은 빨간색 벽돌의 이층집이었지만 낯설고 어색하게만 느껴졌다. 반면에 좁은 공간의 처마 밑이 정겹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얼마 후 비는 그쳤고, 모두들 다른 방향으로, 몇몇은 같은 방향으로 흩어지면서 마치 오랫동안 사귀었던 사람들을 보내듯 섭섭한 마음으로 인사하였다. 그렇지만 마음은 한결 가볍고 흐뭇했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 그것도 전혀 예상치 못한 우연한 만남과 헤어짐이 마치 소나기가 쏟아진 후 무지개가 생기는 아름다움처럼 내 마음을 새롭게 하였다. (문구사 경영)
언 밥상 따끈한 마음 - 박진숙
나는 마지막으로 앞쪽 출입문에다 자물통을 물리고 교실을 나왔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우리 반 영옥이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 줄 몰랐다. 나중에 내가 퇴근을 하며 무심결에 학교 쪽을 돌아보는데 영옥이가 저기 있었다. 왜 아직 집엘 안 갔느냐고 물었지만 영옥인 대답하지 않았다. 집이 많이 어려워 공납금 내는 일이 반에서 꼴찌일 뿐, 문제를 일으킨 일이 없는 조용하고 평범한 아이였다. 할말이 있는거냐고 부드럽게 물었지만 영옥인 웃기만 했다. 방학을 잘 보내라고 나는 말했고 영옥은 목례로 답하고 우리는 헤어졌다. 투명하던 하늘이 어느 새 낮게 내려와 있는 걸 보면 나는 눈을 기다리는 마음이 되었다. 바깥은 추웠지만 자취방은 아랫목이 따끈따끈했다. 일단 내일 아침 일찍 움직이기로 작정하고 나는 아랫목에 엎드려 책을 뒤적가리다 잠이 들었다. 얼마를 잤을까, 눈을 떠보니 방안이 캄캄했다. 무슨 소리가 들리는 듯했는데 그게무슨 소리였는지 몰라 잠시 귀를 기울였다. "선생님이 분명히 방안에 계실 텐데, 잠이 드셨나아...?" 주인집 아줌마의 목소리가 들렷고 내가 열려는데 바깥에서 먼저 조심스레 방문을 열었다. 주인 아줌마 뒤편에 뜻밖에도 우리 반 영옥이가 서 있었다. 파랗게 언 손에 상보를 씌운 큰 양은쟁반을 들고. "거기서 여기가 어디라고. 5리 길은 될 것인데..." 주인집 아줌마가 눈을 쓸면서 혼자말로 영옥이를 가상해 했다. 아무리 들어오라고 해도 영옥인 들고 온 양은쟁반만 내 방에 들이밀고는 도망가듯 냅다 뛰어가 버렸다. 받은 든 양은쟁반은 언 듯이 찼다. 양은쟁반엔 밥상이 차려져 있었다. 밥 한 주발, 김칫국, 깍두기, 건파래무침, 고추장에 박았던 무장아찌, 그리고 양은수저 한 벌. 김칫국은 싸늘하게 식어 있었고 깍두기 국물이 넘쳐 양은쟁반은 지저분했다. 영옥이가 쟁반에 얹어 놓은 종이쪽지에도 깍두기 국물이 번져 있었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영옥 올림.) 나는 바깥으로 뛰어나갔다. 들판은 하얗게 변해 있었고 눈은 다시금 내리는 중이었다. 저만큼 뛰어가는 영옥이를 나는 부르지 못했다. (방송작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