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7월의 무더운 오후, 퇴근을 앞둔 정신여자중학교 교무실에 전화 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박양희 씨 계십니까?"
굵고 점잖은 목소리의 전화를 받은 학교 급사 박양희는 당황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에게 전화를 걸어 올 사람이 없었다.
"제가 박양희인데요..."
"다름아니라 박양희 씨의 원고를 보고 전화를 드렸습니다."
그제야 그녀의 머리 속에 떠오른 것이 있었다. 얼마 전 자신이 썼던 몇 편의 시가 한 출판사에서 기획한 <독자 시집> 난에 실린 적이 있었다.
"저는 시를 쓰는 김유권이라고 하는데, 박양희 씨를 꼭 한 번 만나 보고 싶습니다."
그날 오후 박양희와 첫 대면한 김유권 씨가 말했다.
"우연히 박양희 씨의 시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부모님을 잃고 꿋꿋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그린 박양희 씨의 시가 이미 아마추어의 수준을 넘고 있는 걸 알았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그녀가 시집을 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돕고 싶다고 말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따뜻한 호의에 박양희는 뭐라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난 1995년 1월, 박양희는 드디어 처녀 시집을 출간하기에 이르렀다. <둥지 없는 새는 마음껏 날지 못한다> (운문문화사)라는 제목으로 세상의 빛을 보게 된 이 시집은 박양희가 견뎌낸 인고의 세월을 그대로 담고 있다. 뇌성마비라는 신체적 장애와 현실적 고통에 굴하지 않고 용기와 희망을 갖고 살아온 스물네 해 동안의 삶. 그녀는 태어날 때부터 선천성 뇌성마비라는 짐을 짊어져야 했다. 그것은 그녀가 싸워 나가야 했던 무수한 시련의 전주곡이었다. 태어나면서부터 병약했던 그녀는 언제 꺼질지 모르는 촛불과도 같은 생명이었으나, 어머니의 지극한 사랑과 정성이 위태로운 막내딸의 생명을 지켜냈다. 다행히 그녀의 장애는 그 정도가 심하지 않아 일상 생활에는 큰 불편을 주지 않았다. 약간 어눌한 말씨를 제외하면 평범한 여자아이와 다를 바가 없었다.
하지만 불행은 예기치 않은 곳에서 밀려왔다. 언제나 그녀의 따뜻한 둥지였던 어머니가 3년 간의 투병 생활 끝에 결국 세상을 떠나셨다. 박양희의 나이 채 열 살이 되기 전이었다. 어머니의 죽음으로 가뜩이나 어려운 살림은 더욱 각박해졌다. 슬픔에 잠겨 있던 아버지는 어떻게 해서든 살아 보려고 바둥거렸다. 하지만 아버지의 몸 속에서도 이미 죽음의 병균이 자라고 있었다. 병명은 간경화, 그는 네 딸을 남겨 두고 이내 아내의 뒤를 따라갔다. 박양희는 그때의 슬픔을 이렇게 노래한다.
연기 되어 날아가려고 하는 당신에게
옷과 가재 도구를 드렸더니
재로 만들어 가져가신다.
마을 어귀 한 구석에 타오르는
당신의 껍질들
혼불
--'혼불' 중에서
하루아침에 고아가 된 네 자매는 아버지의 상여가 나가는 날 뿔뿔이 흩어져야 했다. 큰언니는 서울로 직장을 찾아서 떠나고, 둘째 언니와 셋째 언니는 먼 일가 친척집으로, 그리고 박양희는 작은집으로. 그때 그녀는 초등학교 4학년이었다. 작은집에서 박양희는 울보가 되어 버렸다. 돌아가신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과 어딘가로 떠나 버린 언니들에 대한 보고픔이 작은 가슴에 더욱 고여 와 그녀는 날마다 아무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더구나 그녀의 불편한 행동을 보며 놀려대는 아이들은 악마처럼 그녀의 주위를 맴돌았다. 일기를 쓰기 시작한 것은 그즈음이었다. 그녀는 일기장을 펼치고 그리운 사람들의 이름을 빼곡히 적었다. 하지만 아무도 그녀에게 돌아오지 않았고, 자고 나면 눈물에 얼룩진 일기만이 안쓰러운 듯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2년의 시간이 흘렀다. 어느 날 큰언니가 작은집으로 그녀를 데리러 왔다. 빗물이 새는 자취방이나마 자매들이 함께 살 방을 마련한 것이었다. 박양희는 언니를 보자마자 터져 나오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그날 밤 헤어졌던 네 자매는 다시 만났다.
"어떤 일이 있어도 같이 살자."
시간이 빠르게 지나갔고, 언니들은 저마다 열심히 살기 위해 분주했다. 피곤에 지친 언니들이 집으로 돌아와선 씻지도 못하고 잠 속으로 빠져드는 모습을 보며 박양희가 할 수 있는 것은 공부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평소에도 몇몇 학생들만 귀여워하던 담임 선생님이 그녀를 불렀다. 그는 다른 아이들은 부모님이 다녀가시며 수고비라도 주는데 네 부모는 어떻게 된 거냐며 노골적으로 물었다. 그녀는 어물어물 사정을 말했다. 그러자 담임 선생님은 "돈이나 벌지 학교는 뭐하러 다니냐?" 는 말을 남기고 그녀를 돌려보냈다. 그녀는 쏟아지는 눈물을 참으며 집으로 돌아왔다. 사람들에 대한 신뢰가 한꺼번에 무너져 내렸다. 그 시절 그녀의 일기장은 사람들에 대한 미움으로 가득했다.
얼마 후 큰 언닌가 결혼을 했다. 아무런 혼수도 없이 작은아버지의 손을 잡고 식장 안으로 들어서는 언니를 보며 박양희는 눈물로 언니의 행복을 기원했다. 그녀가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셋째 언니까지 모두 결혼을 한 뒤였다.
'이제 정말 혼자구나.'
하지만 마냥 감상에 젖어 있을 수만은 없었다. 새로이 작은 자취방을 얻어야 했고 생활비를 벌어야 했다. 어렵게 일자리를 받아다 밤샘을 하며 일을 하면 손가락이 부르트는 건 예사였다. 그나마 일거리도 많지 않았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견디기 힘든 건 역시 외로움이었다. 돈이 많고 얼굴이 예쁘고 공부를 잘 하는 건 부럽지 않았지만 친구들의 어머니가 학교에 찾아와서 선생님을 만나고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 가슴 한 켠이 텅 비어 버렸다. 그녀는 부모님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과 하루하루의 고단한 삶을 이기기 위해 시를 썼다.
개미야 너는 어쩔래? 이 넓은 세상을 어찌 살아갈래?
너의 그 작은 몸으로 복잡한 이 세상을 어떻게 이겨 나갈래?
이 몸 살아가기도 벅찬 이 세상에
너는 얼마나 서럽겠니?
개미야 네 발 여섯 개로 뛰어라. 누구보다 힘차게 뛰어라
--'홀로된 개미' 중에서
그러던 그녀가 세상을 아름답다고 느끼기 시작한 것은 여고 2학년이 되면서부터였다. 힘겹고 외롭기만 한 그녀에게 첫사랑이 찾아온 것이다. 그녀는 언제나 온화한 미소를 가진 최근식 담임 선생님을 좋아하게 되었다. 물론 가슴속에서만 키우는 사랑이었다. 하지만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자신의 역경을 이길 수 있는 힘이 되었다. 선생님이 그녀의 마음을 알았던 걸까. 어느 날 선생님은 그녀를 불러 손수 마련해 온 돼지고기와 양념장을 조심스럽게 건넸다.
"힘들고 괴로워도 양희는 잘 견딜 수 있을 거야."
선생님이 베풀어 준 온정과 다정한 위로의 말들은 그녀가 세상을 새롭게 이해하도록 만들어 주었다. 어린 시절부터 줄곧 사람을 두려워하고 경계하던 그녀의 닫힌 마음이 어느 순간인지 서서히 열리고 그 위에 사람들에 대한 새로운 애정이 싹트기 시작했다. 선생님에게 향하던 풋풋한 사랑을 뒤로하고 그녀는 여고를 졸업한 뒤, 모교인 정신여자중학교에서 급사로 일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녀에겐 학업에 대한 미련과 시를 쓰고 싶다는 열망이 남아 있었다. 굳이 누구에게 내보이겠다고 생각한 건 아니지만 그녀는 언제나 책을 읽고 시를 썼다. 그리고 마침내 소망하던 자신의 시집을 갖게 된 것이다.
신체적인 장애와 어린 시절의 불행을 딛고 날아오른 새, 박양희가 시집을 낼 수 있었던 것은 각고의 노력과 자신과의 싸움의 결과였다. 그녀의 시집을 받아 든 언니들과 친구들, 언제나 먼 발치에서 지켜보던 최근식 선생님은 눈시울을 붉히며 기뻐해 주셨다. 박양희는 현재 방송대학 국문학과 1학년에 재학중이다. 남들처럼 학업에만 열중할 수는 없지만 그녀는 보다 훌륭한 시인이 되기 위해 기꺼이 오늘의 힘겨움을 이겨 나갈 것이다. 힘들고 괴로웠던 둥지 없는 새의 나래를 접고 새로운 둥지를 만들기 위해.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