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스물다섯 살의 반신불수이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한 번도 땅을 디뎌 본 적이 없다. 늘 누군가에게 업혀지고 안겨져서 움직여야 한다. 처음부터 우리 가정이 불행했던 것은 아니다. 내가 태어난 것은 1960년 5월, 강원도 양구라는 곳에서였다. 아버지는 당시 육군대위였다. 지금도 군복을 입으신 아버지와 예쁜 엄마와 함께 찍은 내 백일 사진을 들여다보면 운명이란 참 알 수 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없이 행복했던 우리들에게 이런 큰 불행이 도사리고 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돌이 지나면서 나는 열병을 앓았다. 병원에서는 단순한 감기라고 오진을 했지만, 나중에야 소아마비임을 알았을 때 이미 나는 목도 가누지 못하고 온몸이 축축 늘어지는 아주 심한 상태였다. 그후 치료를 계속했으나 끝내 하반신만은 영영 불구자 되어 버렸다. 학교 갈 나이가 되어도 갓난아기의 다리만큼밖에 자라지 않는 내 두 다리를 보고 엄마는 몇 번이나 함께 죽어 버리자고 했다. 곧 초등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엄마가 아니면 움직일 수가 없었다. 엄마가 업어다 교실에 앉혀 주고 끝나는 시간에 맞춰 다시 데리러 오셨던 것이 내 어릴 적 모습이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아버지께서는 대위 계급으로 제대를 하셨다. 제대 후 아버지께서 시작한 사업은 다방 경영이었다. 아버지는 사회 경험이 없어 엄마도 함께 뛰셨다. 나와 동생들만이 있는 집안 꼴은 말이 아니었다. 부모님이 안 계실 동안 마냥 울어대는 두 동생을 바라보다 말고 함께 운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래도 그때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집에 돌아오시기가 바쁘게 나를 끌어안고 뺨을 부비시던 아버지. 수염 끝이 따가워 앙탈을 부리면 아버지는 늘 껄껄 웃으셨다.
그후로 나는 관동 중학교에 입학했다. 1학년이라야 통틀어 두 학급밖에 안되는 남녀공학이었다. 시골이라서 도시 학생들에 견줄 수는 없었지만 나는 전체에서 7, 8 등을 했다. 그런데 3학년이 되면서 갑자기 아버지가 고혈압으로 쓰러지셨다. 회복이 되신 후에도 아버지는 몸이 예전처럼 건강하지 못하셨다. 우리 집은 또다시 어둠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업친데 덮친 격으로 다방마저 경영이 어려워졌다. 급기야 엄마는 세 동생을 데리고 서울로 올라가셨고, 나는 아버지와 함께 1년 동안을 그곳에서 살았다. 아버지는 불편한 몸으로 새벽같이 일어나 밥을 지어 놓고 내 옷가지를 빠시고, 나를 자전거에 태우고 20리 길을 달리셨다. 아버지는 나를 경희대학교 약학과에 보내고 싶다고 항상 말씀하셨다. 몸이 약하고 불편할수록 의지가 강해야 된다는 것, 이 세상에는 나보다 더 불편하고 가엾은 사람이 많다는 것, 그래도 내 곁에는 아버지가 항상 계실 거라는 말씀이 나를 행복하게 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나와의 약속을 끝내 지키지 못했다. 내가 중학교를 졸업하고 엄마를 따라 서울로 올라온 이듬해 6월, 갑자기 운명을 달리하시고 말았다. 중학교만 졸업하고 집에 있는 불구의 딸인 나와 고등학교 1학년인 장남, 중학교 1학년인 둘째딸과 초등학교에 갓 입학한 막내아들, 그리고 엄마. 엄마가 받으신 충격과 암담함이 어떠했을까. 공교롭게도 세 아이를 모두 학교에 입학만 시켜 놓고 눈을 감으신 아버지 때문에 엄마는 통곡을 하셨다. 하지만 마냥 실의에 빠져 있을 수는 없었다. 엄마는 어린 것들의 생존을 위해 동분서주하기 시작했다. 연탄 공장의 구내 식당에서 밥을 팔고, 길거리에서 튀김 장사도 하였다. 153센티미터가 채 될까말까 한 엄마의 키가 그후론 점점 줄어드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밤낮으로 일해 세 아이의 학비를 대고, 나를 포함한 우리 가족의 수발까지 도맡아 하시면서도 엄마는 한 번도 몸져 누우신 적이 없었다.
이 무렵 나는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을 보고 부러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차츰 나도 공부하고픈 생각이 일었다. 그러나 엄마가 얼마나 어렵게 우리 가정을 이끌어 가고 있는지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으므로 나는 내가 계획한 속마음을 엄마에게 털어놓을 수 없었다. 정말로 공부가 하고 싶었다. 학교를 졸업한 지 7년, 그동안 책이라는 걸 들여다볼 기회가 없었지만 그래도 공부만은 정말 하고 싶었다. 며칠을 끙끙 앓다 간신히 엄마에게 내 뜻을 비쳤다. 뜻밖에도 엄마의 대답은 간단했다.
"네 뜻이 정 그렇다면 한번 해보자구나."
마냥 죄송스러웠다. 작년 4월, 엄마는 스물다섯 살 난 큰 아기인 나를 업고 그동안 눈여겨보아 온 신설동에 있는 고시학원을 찾아가 입학 수속을 마쳤다. 내가 대입 검정고시반의 학생이 된 것이다. 엄마는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에도 석관동에서 조그만 분식점을 꾸려 가고 계셨기 때문에 나는 새벽반을 들어야 했다. 새벽 다섯 시 사십 분에 시작해서 여덟 시에 끝나는 수업을 듣기 위해 엄마와 나는 새벽 네 시면 별빛을 헤아리며 집을 나섰다. 수업 도중에 반을 옮기거나 화장실에 가고 싶으면 밖에서 서성거리시는 엄마의 손이 필요했다. 그렇게 1년을 보내고 올해부터는 야간반으로 자리를 옮겼다. 야간반은 저녁 여섯 시 삼십 분에 시작이었다. 하지만 그 시간은 학생 손님이 가장 많은 때였기 때문에 엄마와 나는 세 시부터 학원으로 갔다. 미리 나를 학원에 데려다 놓고 엄마는 다시 집으로 가 장사를 하시다가 밤 열 시에 데리러 오셨다.
나는 엄마의 등에 업혀 계단을 오르내릴 때마다 미안한 마음에 늘 새가 되는 꿈을 꾸었다. 아, 내 몸이 새라면 혹은 깃털처럼 가벼워질 수만 있다면! 1984년 8월에 있던 대입 검정고시가 내게는 1차 관문이었다. 그것이 제대로 실현되었으니 이제는 약학 대학에 가고 싶다. 엄마는 내가 한의사가 되었으면 하신다. 그러나 한의사가 약사가 어디 생각처럼 쉬운가. 우선은 실력도 문제지만 또 입학 정관에 불구자를 제한하는 학교도 많으니까. 하지만 나는 해낼 것이다. 비록 장애자지만 나도 뭔가 쓸모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이제껏 도움만 받고 살아왔으니까. 이제는 남을 위해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검정고시 합격 수기 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