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합 종료를 알리는 사이렌이 길게 울렸다. 1971년도 제26회 청룡기 야구 대회에서 그 당시 내가 맡고 있던 경북고가 난적 경남고를 물리치고 감격의 우승을 차지한 순간이다. 기쁨에 울먹이며 나를 헹가래치는 선수들. 나도 기쁨에 마냥 들떠 있었다. 그런데 한쪽 구석에서 들려 오는 어머니와 아들의 대화가 내 가슴을 찡하게 만들었다.
"발아, 발아, 니는 와 딴 사람보다 땀을 그리 많이 흘리노?"
우리 팀의 4번이고 우승의 공로자인 정현발 선수 어머니의 울먹이는 목소리였다. 현발이가 야구부에 모습을 처음 나타냈을 때 나는 녀석을 어느 부잣집 아들로 알았다. 그만큼 녀석의 복장이나 태도가 당당했으며 귀공자 티가 났다. 훗날 녀석이, 대구 방적 공장에서 흩어진 실을 고르고 청소를 하는 홀어머니와 함께 어렵게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그 녀석의 그 당당한 모습이 껴안아 주고 싶을 정도로 대견스러웠다.
"현발아, 저녁 먹으러 가자. 내 오늘 한턱낼게."
현발이의 어려운 처지를 아는 선배들이 녀석을 가끔 저녁에 초대했다. 그러면 녀석은 꼭 묻곤 했다.
"내 혼잡니꺼? 아니몬 우리 야구 부원 모두 다 갑니꺼?"
"니 혼자 가자."
"그라몬 내 안 갈랍니다."
나는 속으로 감탄하곤 했다. '아하, 녀석은 됐다. 뜻이 있는 놈이다.'
청룡기 야구 대회 결승 경기가 있던 날, 녀석의 어머니는 동료 어머니의 도움으로 생전 처음 서울 운동장 스탠드에 앉게 되었다. 야구에 대해 전혀 모르는 어머니는 운집한 3만의 관중, 휘황한 야간 조명등, 그 아래에서 뛰고 있는 아들이 대견스럽기만 했다. 현발이가 삼진 아웃을 당해도 "우리 발이 잘한다"며 박수치기에 바빴다. 그러나 차츰 어머니는 마음속 한 구석이 아파 오는 것을 느꼈다. 경기가 진행됨에 따라 선수들 모두 땀에 흠뻑 젖었는데 어머니 눈에는 현발이가 잘 먹지 못해서 남들보다 유난히 땀을 많이 흘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경기가 끝날 때까지 줄곧 그런 안타까움에 젖어 있었다. 이런 어머니의 안타까움을 현발이는 단 한마디 대답으로 풀어 버렸다.
"이거예, 이건 땀이 아니라예. 아까 쉬는 참에 더워서 물을 끼얹은 거라예."
이런 현발이와 함께 최근에 내가 지도한 어떤 선수의 모습이 떠오른다. 녀석도 무척이나 가난했다. 아버지는 일흔 살 고령으로 병석에 누워 계시고 어머니는 도로 공사장에서 자갈 붓는 인부셨다. 내가 서울고에 처음 부임하던 날 생계를 돕기 위해 야구를 그만 두겠다고 찾아온 녀석에게 나는 말했다.
"야구에 흥미가 없으면 그만둬도 좋다. 그러나 생계 때문이라면 네가 좋아하고 소질 있는 것에 더욱더 열심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비록 당장 손 안에 무엇이 잡히지 않더라도 말이다."
일단 결심이 선 뒤 녀석의 노력은 눈물겨웠다. 새벽 한두 시, 말뚝에 박아 놓은 타이어 치는 소리에 잠을 깬 동네 사람들이 마구 항의를 할 정도였다. 지금도 녀석의 손바닥을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온통 흠집이 생기고 못이 박혀서, 여자들이 보면 무섭다고 도망갈 정도였다. 작년에 졸업하고 지금은 한양대 3루수로 활약하는 이승희 군, 그의 노력이 열매 맺을 날을 기대해 본다. (서울고 야구 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