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가을 김장철이 다가왔을 무렵의 일이다. 어떤 지게꾼이 김장독을 지고 건물 옥상까지 오르다 좁은 계단에서 떨어져 큰 부상을 입었다. 아마도 어두운 좁은 계단인 데다가 영양 실조로 시력이 흐려지고 다리가 떨려서 발을 헛디딘 모양이었다. 피투성이가 되어 병원에 실려 온 그 지게꾼은 동맥이 끊어져 있었고, 출혈성 쇼크로 빈사 상태에 빠져 있었다. 나는 의사의 입장에서 최선을 다해 동맥을 잇고 근육과 피부를 꿰매어 응급 치료를 했다. 치료를 마치고 수술실 밖으로 나오는데 웬 남루한 차림의 아주머니가 뛰어들어와 나를 붙들고 말했다.
"어떻게 해서든지 금년엔 김장을 담그려고 겨우 독값을 마련했는데, 독이 깨졌다니 독값은 어떻게 해요?"
처음에 지게꾼의 아내인 줄 알았던 나는 그 말을 듣고 어리둥절해졌다. 지게꾼의 입장에서는 분명히 큰 재난이고, 병원 측으로선 이런 경우 치료비는 대개 인정상 받지 못하고 끝내야 했다. 그런데 지금 이 아주머니의 머리 속은 깨어진 독만으로 가득 차 있는 모양이었다. 내가 말했다.
"아주머니 사정도 딱하긴 하지만 저 환자의 형편도 말이 아니군요. 겨우 목숨을 건진 셈인데 하루벌이 하는 사람이 돈이 있겠어요?"
아주머니는 그제야 정신이 든 듯 진정 미안하다는 표정을 짓고 말없이 돌아갔다. 환자가 의식을 찾은 뒤에 집을 알아보니 충청도 어느 시골이었다. 그는 식구들과 헤어져 서울로 올라와 남대문 노무자 숙소에 거처를 정한 지 한 달도 채 안되었다는 것이었다. 며칠 뒤 환자의 동생이 나타나 간병을 하게 되고, 환자는 한 열흘쯤 치료를 받고 나서 시골로 내려가게 되었다. 그런데 막상 떠난다는 날짜가 되어도 동생은 여비를 못 구했는지 퇴원을 하루 이틀 미루기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독 주인 아주머니가 느닷없이 병원에 찾아왔다.
"의사 선생님, 얼마 안되지만 환자 치료비에 보태 주세요. 금년에는 꼭 김장을 담그려고 했는데 이렇게 됐으니, 김장은 내년부터 담그기로 하고 김장 담그려고 모아 둔 돈을 여기 가져왔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모습은 성스럽기까지 했고, 그 음성은 두고두고 내 귀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의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