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봄에 갑자기 언니가 병원에 입원했다는 전갈이 왔습니다. 그 무렵 저도 다리에 신경통을 앓고 있던 참이라서 당장 가지 못하고 한 달쯤 후에 가까스로 서울대병원으로 언니를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그 좋던 언니의 몸은 피골이 상접하여 차마 눈뜨고 볼 수가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제가 잠든 것 같은 언니의 손목을 잡으며 "성님!" 하고 부르자 언니는 심봉사 눈처럼 눈꺼풀을 떨며 "어이 동숭! 자네 기다리다가 눈 빠지겠네" 하고 울었습니다. '이것이 형제 정이구나. 나이 들고 병 들면 형제 소중한 것을 깨친다더니......'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철들고 처음으로 언니한테 잘못했다고 빌었습니다. 이렇게 기다리고 있던 언니한테 앉은뱅이 걸음으로라도 어서 올 것을 하고 저도 울었습니다.
그날부터 저는 언니의 병원 수발을 하였습니다. 특히 언니는 우리가 어렸을 적의 이야기를 해주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보리 퍼내서 떡 사 먹던 기억을 말할 땐 그 고통중에서도 웃으셨습니다. 며느리도 가라, 딸네들도 가라 해놓고서 한사코 저하고만 있자고 붙들었습니다. 병원에서 암 환자인 언니한테 퇴원할 것을 권하였습니다. 언니는 저더러 퇴원해서 시골 집으로 함께 가자고 하였습니다. 시골 언니네 가면 제가 좋아하는 홍어회도 고로쇠약수도 먹게 해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환자 곁에 있는 일이 얼마나 힘이 드는가요? 저는 금방 따라간다고 언니한테 철석같이 약속해 놓고서는 우리 집에 가서 한 열흘 쉬었습니다. 그런데 무정한 전화는 제가 언니한테 가려고 가방을 챙기고 있던 날 아침에 오고 말았습니다. 제가 병실을 나서려고 하자 베개 밑에서 구겨진 1만 원짜리 한 장을 내놓으면서 "동숭, 이걸로 차비해서 택시 타고 얼른 와주소잉" 하던 우리 언니. 그 해맑은 모습이 지금도 눈앞에 삼삼히 떠올라와 제 가슴을 훑어 놓습니다. (인천시 북구 계산동 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