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957년 봄에 서울 혜화동 동성고등학교 뒤에 자리한 성신중고등학교(가톨릭교회의 신부가 되기 위한 소신학교)에 입학해 착실하게 공부하며 고등학교에도 그대로 올라갔다. 학생들은 중1부터 전부 신학교 공동 기숙 생활을 해야만 했다. 고등학교 1학년이 되어 교모에 높을 고 자를 달고 나니 어깨가 으쓱하고 괜히 건들거리고 싶은 마음은 신학생이라고 없을 리 없었다. 나는 그때에 남들처럼 튼튼한 구두를 신고 있었다. 그래서 집에다 워카에 까만 물감을 들여서 갖다 달라고 편지를 썼던 것이다. 면회실에 커다란 잠바를 입으신 아버지는 빙그레 웃으시며 계셨고 탁자 위에는 신문지로 싼 큼직한 물건이 있었다. 아버지 앞에 서서 인사를 깍듯이 하고 자리에 앉았다. 나는 속으로 아버지에게 대견하게 보여야 하고 사치스럽게 보이면 안되고 학교 생활이 힘들어도 모든 게 좋다고 말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여하튼 아버지를 만나니 기쁘기도 하지만 어색하기도 했다. 이러저러한 문안을 올린 나에게 아버지는 구두를 풀어서 신어 보라는 것이었다. 잔뜩 호기심에 싸여 신문지를 한 겹 두 겹 벗기면서 '군인 구두인 워카보다는 일반 구두면 더 좋을 텐데 '하는 사치스러운 생각을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안돼! 아버지가 신학생인 안에 대해 실망하실 거야' 하는 생각도 하면서 풀었는데, 순간 번쩍하고 빛나는 구두 코끝이며 발목의 부드러운 가죽이 아주 비싼 부츠였다. 당시에는 이런 구두면 백 명 중 한두 명이 신을까말까 한 정도였다. 외출하거나 놀러 갈 때 신으면 뻐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는 매일 서울 장안을 두 바퀴씩 자전거로 도시면서 자동차 부속을 배달하는 일을 하시던 때였다. 아버지의 힘든 일을 생각하면 나의 콧등이 시큰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자동차 부속 판매가 전망이 있다며 너도 나도 끼여들었고 서울이라도 자동차들이 너무나 적어 소비가 잘 안되므로 이 장사는 누가 계속 더 많이 외상을 깔아 놓느냐 하는 경쟁이 일던 때였다. 이 정도의 구두를 사려면 일주일 정도의 수입을 몽땅 합해야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잠시 구두를 내려다보다가 불현듯 퉁명스럽게 말을 해버리고 말았다.
"아버지, 나 이거 안 신을래. 도로 가져가요."
속으로는 가져가실까 봐 불안해 하면서도 겉으로는 말이 왜 그렇게 나왔는지 잘 모르겠다. 내가 멋 좀 부리려고 혼자 몰래 꿈꾸던 것을 그 이상으로 알아맞혔다는 데 대한 불쾌감이 갑자기 내 안에서 동의도 없이 발동해 버린 것이다. 나는 왠지 아버지를 괴롭히고 싶은 마음까지 갑자기 들었다. 아마 반항기라 그랬는지, 너무 좋아 그랬는지, 욕망이 너무 쉽게 이루어져 허탈감에 그랬는지 좌우간 잘 모르겠다.
"내가 워카 물들여 달랬지 누가 이런 거 갖다 달랬어?"
원래 아버지는 모든 것을 좋게만 해석하시는 착한 분이시기에, 그게 나를 짜증나게 한다고 속으로 이유를 아버지께 돌리려는 심산도 일어났다. 그러나 아버지는 잔잔한 음성으로 말씀하셨다.
"그래도 아버지가 사 온 건데 신어 보기라도 하려무나."
나는 하라는 대로 묵묵히 신어 보았다. 약간 컸다. 그래도 고맙다는 말이나 좋다는 말이 나오질 않았다. 어색한 투정을 하면서 사치스럽다느니, 운동장에서 마구 신지는 못하겠다느니, 너무나 커서 양말을 다섯 개는 신어야 되겠다느니 하며 투덜대었다. 그러는 가운데 나의 속마음이나 겉마음도 모두 동의해서 싫다는 쪽으로 밀어붙이기로 작정해 버렸다. 한참이나 나의 어리석은 이중적인 불평을 들으시곤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시며 멋쩍은 손놀림으로 꾸역꾸역 구두를 다시 싸시는 아버지의 모습, 그때 그 모습이 '아버지'라는 단어만 들으면 언제나 내 마음에 뭉클하며 솟아난다.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