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겨울 오후, 동대문 근처 의약품 도매 상가에 나갔다가 우연히 지난 날의 한 여환우를 만났다. 몹시 초췌하고 병색이 짙은 얼굴 - 역시 또 실패인가? 나의 그녀는 H요양원에서의 투병생활의 암운 때문에 서로 깊이 애중하고 있으면서도, 그저 "잘 가요" "그럼 안녕히" 두 마디로 아무런 기약도 없이 헤어지고 말았었다. 나는 그녀가 요양원에서 줄곧 겪어야 했던 투병의 위협을 아직도 계속받고 있는 것을 알았다. 극도로 쇠약한 결핵 환자가 마음과 육체의 절대적 안정을 그토록 철저히 침해받고 있었다는 것. 이제 나는 너무나 쉽게 결단을 내렸다. 그녀에게 구혼하면서 "대답은 듣지 않겠노라"고 하였다. 사람들은 우리가 철없는 불장난을 하려는 줄로만 알았을까. 그들의 이해를 얻기까지 우리는 무척 부심하였다.
다음해 겨울은 그녀의 고향인 낙동강 상류에서 투병 생활을 하였다. 강을 사이에 두고 그녀의 마을이 보이는 대안에 조그만 방을 구해 들고 좌선과 와선(?)과 산책으로 하루 해를 보냈다. 새벽에 강을 건너 그녀의 집에서 조반 먹고 도시락을 싸 가지고 다시 월강했다가, 저녁에 다시 강을 건너 석반 먹고, 어두운 낙동강 건너올 때면 그 싸늘한 낙동강의 모래 바람도, 강물 소리도, 초생달 그림자도 모두가 내겐 무한히 깊고 따스한 감동만 주었다.
언젠가 한 번은 밤새워 원고를 쓰다가 새벽에 그만 잠이 들었다. 약속된 조반 시각이 훨씬 지나도 내가 강가에 나타나지 않으니까 바람 부는 강둑 위에 나와서 기다리던 그녀가 문득 헐레벌떡 강을 건너 숨을 헐떡거리며 뛰어 들어왔다. 겁에 질린 얼굴로 녹아 떨어진 나를 어린애처럼 울먹이며 흔들어 깨운다. 눈을 뜨고 일어나 영문을 물으니, 그제야 그저 망연자실하며 눈물만 주르르 흘린다. 바보처럼 바보처럼... 내가 가스 중독으로 죽어 있는 줄 알았다니.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