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이야기 1 - 정채봉, 류시화 엮음
1 가족
소리 없는 웃음 터진 날 - 김윤덕
영화는 오늘 아침 책가방에 사회, 산수, 음악책에다 분홍색 부채 하나를 더 챙겨 넣었다. 가을 운동회 때 동네 어른들께 보여 드릴 부채춤 연습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다시, 아니 아니 틀렸어!' 호랑이 같은 무용 선생님께 야단맞아 가며 한 시간 동안 팔을 올렸다 내렸다 할 생각을 하니, 영화는 아침부터 몸에 땀이 차는 것 같았다.
"우아와... 우아... 우우."
책가방을 등에 지고 문을 나서는데, 엄마가 뭐라고 웅얼거리며 손짓을 하셨다. '아참, 도시락!' 영화는 말 못하는 엄마의 표정과 손짓을 보면 엄마가 뭐라고 하시는지 금방 알 수 있다. 영화네 집은 영화만 빼고 나머지 여섯 식구가 말을 못한다. 태어날 때부터 말을 못하셨다는 아빠(양선우 씨, 42세)와 엄마(민순식 씨, 40세)는, 둘째 영화를 낳았을 때 아기의 귀와 입이 트인 것을 보고 부푼 마음에 내리 삼남매를 더 낳았는데, 불행히도 셋 다 말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 동네 사람들은 영화네 집을 벙어리네라고 부른다. 그 소리에 금세 기가 죽는 영화는 '우리 아빠 엄마는 왜 저런 사람들일까?' 하고 화가 나지만, 학년이 올라갈수록 평생을 말 못하고 살아가는 부모님이 너무 불쌍하다는 생각을 한다.
엄마에게 "안녕 안녕" 하고 손을 흔든 영화는 동네 어귀를 향해 걸어 나왔다. 영화는 집에서 2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는 학교를 걸어서 다닌다. 맨다리에 때가 탄 반바지를 입고 터덜터덜 걸어 가는 영화는 꼭 선머슴 같다. 걷다가 심심해서 영화는 나무에 붙어 있는 매미를 잡아 손으로 꼭 쥐고 학교까지 그 노랫소리를 들으며 걸어갔다. 학교에는 임진왜란 전에 심어졌다는 450년 된 느티나무 한 그루가 운동장 한 구석에 버티고 서 있는데, 나무가 만들어 준 넓다란 그늘 아래서 여자 아이들은 맨발로 곧잘 고무줄 놀이를 했다. 영화는 오늘 산수 시간에 큰 수를 숫자로 나타내는 법을 배웠다.
"0이 여덟 개면 억이에요. 그럼 30,000,000,000은?"
"3백억이요!"
선생님의 물음에 아이들이 일제히 대답했다. 3백억? 대체 그 숫자는 얼마나 큰 것일까, 100원짜리 동전이 몇 개 있어야 3백억이 되는 거지? 공책에 동그라미를 부지런히 그리다, 영화는 문득 제 저금통장에 씌어진 다섯 자리 숫자가 생각났다. 35,200. 종례 시간이 끝나고 담임 선생님이 영화를 교무실로 오라고 하셨다. 새 학기 가정방문 때문에 그러시나, 해서 영화는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선생님은 영화에게 전혀 뜻밖의 소식을 저해 주셨다. 한 달 전 영화는 저축에 관한 글을 하나 써 낸 적이 있는데, 그 글이 서울까지 올라가서 전체 대상에 뽑혔다는 것이었다. 곁에 계시던 선생님들이 "영화 좋겠네" 하시며 벙글벙글 웃어 주셨다. '내가 그때 무슨 이야기를 썼었지? 맞아, 아빠의 저금통장 이야기!' 영화네 집에는 두 개의 저금통장이 있다. 하나는 아빠 것이고 또 하나는 영화의 것이다. 아빠는 석회 공장에 나가 일을 해주고 하루에 1만 5천 원을 받아 오시는데, 그 돈을 조금씩 쪼개 두었다가 월말이면 우체국에 가서 저금을 하신다.
그렇게 3년 동안 부어 온 적금이 지난 3월 만기가 되어 아빠에게 110만 원이라는 목돈이 생겼다. 아빠는 엄마와 상의하여 괴산 장날 암송아지 한 마리를 사오셨다. 영화네 식구들을 닮아 눈망울이 새까만 송아지는 영화네 집에서 가장 큰 재산이다. 아빠는 또 얼마 전에 3년짜리 체신 적금을 하나 더 드셨다. 이번에는 그 돈을 모아 충주 농아학교에 있는 영모 오빠(14세)와 옥화(8세)에게 특수 보청기를 사주실 거라고 하셨다. 보청기는 당장에 필요했지만, 하나에 50만 원이나 하는 보청기는 하루벌이로 먹고 사는 영화네 집 형편에 벅찼다. 영화는 식구들을 위해 열심히 저축하시는 아빠가 참 고마웠다. 영화에게도 통장이 하나 있다. 통역(?)을 하러 아빠를 따라 우체국에 다녔는데 그곳에 있는 언니가 하나 만들어 준 것이다. 통장이 생기고 나서 영화는 버스도 안 타고, 아이스크림 가게를 지날 때도 눈을 꼭 감았다. 그렇게 해서 모은 돈이 3만 5천 2백 원. 영화는 조금씩 불어 가는 아빠의 통장과 제 통장이 식구들의 희망을 두 배로 불어나게 해준다는 이야기를 글로 썼다가 이번엔 상을 탄 것이었다.
집과는 반대쪽으로 2킬로미터쯤 걸어가면 아빠가 일하시는 하얀 석회 공장이 나온다. 영화의 아빠는 그곳에서 시멘트 포대를 트럭에 실어 나르는 일을 하는데, 영화는 무거워 보이는 시멘트 포대를 한 번에 번쩍번쩍 들어 옮기는 아빠의 모습이 무척 자랑스러웠다. 하얀 석회가루가 온몸에 묻어 아빠는 마치 눈사람 같았다. 공장 문 한 귀퉁이에 쪼그리고 앉아 하얀 땅바닥에 돌멩이로 그림을 그리며 놀고 있는 영화에게 아빠는 조금만 기다리면 된다고 손가락으로 신호를 보내셨다. 영화의 자랑을 듣고 아빠는 정말 아이스크림을 한 개 사주셨다. 하지만 아빠는 영화의 말을 잘 알아듣지는 못하시는 모양이었다. 손가락을 접었다 폈다 하며 발을 동동 구르던 영화는, 아빠가 초등학교를 못 다년서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영화네 집은 새 집이다. 돈이 많아서 새로 지은 집이 아니라, 지난해 홍수로 집이 털썩 내려앉아 동네 사람들이 다시 지어 준 것이다. 나라에서 얼마 보태 주고 남의 돈도 빌리고 해서 다시 집을 지었는데, 영화 엄마는 빚 갚을 길이 막막한지 요사이 한숨이 부쩍 늘었다. 영화는 전보다 더 좋은 집에 사는데도 엄마는 별로 즐거워하는 것 같지 않아 이상했다. 하지만 밭에서 썩어 가는 고추 때문에 엄마가 걱정하신다는 것은 영화도 알고 있다. 남의 땅을 빌려 부치는 형편에 그 흔한 햇볕은 여름내 내리쪼여 주질 않아 고추들이 시들시들 썩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엄마는 아빠와 자주 다투셨다. 엄마의 걱정을 모를 리 없는 아빠지만 속이 상하면 하루 번 돈으로 몽땅 술을 드시고 오는 날도 있는데, 그런 날이면 두 분은 알아들을 수 없는 괴성을 지르며 마루에 나가 싸우곤 하셨다. 그러면 영화는 흥모(6세)와 연화(4세)를 데리고 방으로 들어가 숨죽이고 앉아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엄마의 얼굴에서도 모처럼 웃음꽃이 피어났다. 아주 오랜만에 고개를 내민 초가을의 햇살만큼이나 기쁜 소식을 딸아이가 안겨 주었으므로. 영화는 이번에 상금으로 50만 원을 타면, 그 돈을 모두 아빠의 저금통장에 넣기로 했다. 상금은 아빠의 고마운 저금통장 때문에 받은 것이니까. 그러면 오빠와 동생의 보청기를 1년 더 빨리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오늘 저녁에는 엄마가 맛있는 소시지 반찬을 만들어 주셨다. 영화가 큰 상을 탄다고 엄마는 소시지에 달걀을 씌워 기름에 자글자글 부쳐 주셨다. 소시지를 한 입 물다 엄마랑 눈이 마주친 영화가 히쭉 웃었다. 아빠도 조용히 미소를 지으셨다. 영화네 집 앉은뱅이 밥상 위로 소리 없는 웃음이 번져 갔다. (샘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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