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987년 가을에 교원 발령을 받아 오지의 섬 학교에서 2년 반을 보내고 1981년 봄, 포항 인근의 읍 소재지에 새로 부임을 했다. 막연한 불안과 미지의 세계에 대한 기대를 안고 나는 함께 발령 받은 백 선생과 포항에 도착했다. 우리는 좀더 넓은 방에서 살아보자는 생각에서 아침밥도 거른 채 새벽부터 방을 구하러 돌아다녔다. 2월 말이지만 겨울이 그 끝자락을 드리우고 있던 터라 날이 몹시 추웠다. 어중간한 옷차림의 우리 두 사람은 춥기도 하고 서글프기도 하고 배까지 고팠다. 하지만 백 선생이나 나나 배부른 형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팔짱을 끼고 이 골목 저 골목을 헤매 다녔다. 여고 시절 수학 여행 때말고는 와본 적이 없는 곳이라서 포항은 완전히 생소한 곳이었다. 누구 하나 아는 사람 없는 곳에서 그날 나는 아주 눈에 익은, 그러면서도 너무 낯선 듯한 사람을 만났다. 다름아닌 아버지였다. 집에서 한 밥상에서 같이 밥 먹고 전방 2미터 안에서만 보던 아버지를 포항이라는 낯선 곳에서 드라마같이 만나니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새벽 시간을 이용해 포항에 수금하러 온 아버지는 더운 국물 한 모금 못 드셨는지 몹시 추워 보였다. 도저히 우리 아버지라고 여기고 싶지 않은 초라한 모습, 낡은 잠바 사이로 어깨를 움츠린 아버지는 내가 평생을 다 바쳐 모셔도 아깝지 않을 불쌍한 모습이었다. 내가 아버지께도 내 친구에게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엉거주춤하는데 친구가 물었다.
"너거 아부지가?"
친구의 말에 아버지는 겹겹이 쌍꺼풀 진 송아지 눈 같은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을 줄줄 흘리시며 말씀하셨다.
"아이고, 이 불쌍한 가시나야! 니 뭐하로 이 춥은데 이 꼴로 다니노? 방 구해 돌라카지 니가 뭐할라꼬 밥도 안 묵꼬 이 춥은데 어설프게 다니노."
나와 아버지는 서로를 불쌍하게 바라보고는 그날 그렇게 헤어졌다. 훗날 나는 어머니로부터 아버지가 그날 가슴 아파 점심도 안 잡수시고 우울해 하셨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그때 국밥이라도 같이 먹자고 붙잡는 손을 창피하다고, 우리 둘이 방을 구할 수 있다고 고집을 부린 것이 내내 마음 아팠다. 그날 함께 따뜻한 국밥을 먹었다면 아버지도 추운 마음을 녹일 수 있었을 텐데, 나는 아버지 가슴의 여러 구멍 중에 또 한 구멍으로 바람이 들도록 하고서는 아버지를 영원히 잃어버렸다. 그때 친구 몰래 터미널 화장실에서 흘렸던 그 눈물의 몇 배가 아버지 가슴을 적셨을까 생각하니 나는 지금도 눈물이 난다. 아버지, 보고 싶어요. (포항 두호초등학교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