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이야기 1 - 정채봉, 류시화 엮음
1 가족
가슴속 빛을 꺼낸 어머니 - 정수연
지난해 10월 17일 오후 두 시, 여의도 63빌딩 국제회의장에서 한국 장애인 부모 협회가 마련한 제8회 전국 장애인 부모 대회가 열렸다. 성치 않은 자식을 두었기에 늘 가슴 저리지만 진한 교감이 오가는 자리였다. 두 시간 남짓 계속된 이날 행사의 꽃은 역시 장한 어머니상 시상식이었다. 긴장 속에 드디어 수상자가 발표되었다. 과천에 사는 김혜자 씨(53세, 과천시 과천동 514)가 바로 그이였다. 평소에는 웃음이 가실 날이 없을 정도로 쾌활한 그녀였지만 이날만큼은 웃음 대신 뜨거운 눈물이 얼굴을 적시고 있었다. 하나도 아닌 둘씩이나 되는 앞 못 보는 아들들을 키워 온 그 세월이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지나가는 순간이었다. 김씨가 장애인의 어머니가 된 건 둘째 아들인 성재(22세)군을 낳고부터다. 스물다섯 살에 결혼해 큰딸 효정과 큰아들 성찬을 낳아 기를 때까지만 해도 그렇게 큰 고통이 눈앞에 다가설 줄 짐작도 못했었다. 시련은 1971년 둘째 아들 성재가 태어날 때부터 서서히 그 흉칙한 얼굴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성재를 낳았을 때 김씨의 소망은 잦은 병치레로 애간장을 태우던 큰아들과는 달리 좀 건강했으면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조차 지나친 욕심이었을까. 성재는 태어난 지 한 달 후부터 사시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갓난아기에게 가끔 있는 일이라 처음엔 별로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김씨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일이 일어났다. 백일이 지나고 나서 눈앞에 장난감을 갖다 줘도 아이는 눈동자 한 번 굴리지 못하고 사물을 분간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더럭 겁이 난 김씨는 아이를 들쳐 업고 서울로 달려와 전문 안과를 찾아갔다. 아이를 진찰하고 나오는 의사의 얼굴은 그리 밝지가 않았다. 의사가 천천히, 무겁게 입을 열었다.
"현재 상태로 보아 자라더라도 앞을 볼 가능성이 희박합니다. 치유가 불가능한 선천성 시력 장애인 것 같습니다."
고칠 수 없다는 것, 그것은 이 아이가 평생 어둠 속에서 지내야 한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벼랑 끝에 섰다 해도 절대로 자식을 포기할 수 없는 게 부모의 마음이다. 김씨는 틈만 나면 성재를 업고 전국의 유명 안과를 찾아 다녔다. 그러나 결과는 언제나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아이를 업고 다니면서 참으로 많은 눈물을 쏟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녀는 마음을 수습했다. 강한 어머니가 되어갔다. 그러나 또 다른 불행이 연이어 일어나 그녀의 마음을 무너뜨렸다. 성재가 세 살 때 태어난 셋째 아들 성기가 성재와 똑같은 증세를 보였던 것이다. 그녀는 또다시 전국의 유명한 안과를 이 잡듯 찾아 다녔다. 집안에 비슷한 질병을 앓은 사람도 없고, 아이를 가졌을 때 음식을 잘못 먹은 적도 없는데 둘씩이나 같은 병에 걸릴 리가 없다고 위로하면서...... 그러나 어딜 가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너무도 기가 막혀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이때부터 김씨는 스스로 두 아이의 눈과 손발이 되고자 독하게 마음먹었다.
성재가 유치원에 갈 나이가 되었어도 그녀는 선뜻 성재를 유치원에 보낼 수가 없었다. 앞이 안 보이는 아이를 보내면 다른 엄마들이 싫어할 것 같아서였다. 대신 그녀는 자신의 집을 유치원으로 만들고, 자기가 직접 유치원 선생이 되었다. 그녀는 틈만 나면 아이들에게 동화책을 읽어 주고 바람소리며 물소리, 새소리 등을 들려주었다. 그녀는 보이지 않는 그것들이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이 되리라 굳게 믿었다. 그러나 그녀의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성기는 곧잘 짜증을 냈다. 이리저리 뛰어다니다가 앞이 안 보여 답답하면 제 성질을 못이기고 울부짖듯 소리를 질러댔다. 그때마다 김씨의 가슴은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졌다. 그 또래의 다른 아이들도 놀다 보면 으레 상처나고 피도 나게 마련이지만, 그녀는 아이들 몸에 조그마한 상처라도 나면 그것이 앞을 못 봐 그러는 것 같아 더욱더 가슴이 아팠다. 1978년, 아이들이 학교 갈 나이가 되어 그녀는 성재를서울 맹아학교에 입학했다. 이때부터 그녀의 생활은 집이 있는 과천과 서울을 시계추처럼 오가는 것으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그때는 과천이 개발되기 전이라 서울에 한 번 오려면 버스를 서너 번씩 갈아타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아이들을 단 하루도 결석시키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처지를 원망하지 않았다. 모든 것을 자신의 운명이라 생각했고, 매사를 좋게 받아들이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삶이 더 나은 쪽으로 나아가리라 믿었다. 딱 한 번 사람들을 원망해 본 적이 있었다. 언젠가 한 번은 집안에 일이 있어 아이들 학교 끝날 시간에 맞추질 못했다. 수업이 한참 전에 끝났는지 학교가 조용했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아 평소에 다니던 길을 이리저리 헤맸지만 두 아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어디로 간 걸까? 저희들끼리 택시 한 번 타본 적이 없는 아이들인데......' 애간장을 태우며 이리저리 낯선 골목길을 헤매는데 복잡한 길 저편에 낯익은 두 얼굴이 보였다. 두 형제는 서로 의지하기도 하고, 위로도 하면서 더듬더듬 버스 정류장을 찾아가고 있었다. 바삐 걷는 사람들에게 어깨도 부딪치기도 하고 패인 곳에 발을 헛딛기도 하면서...... 멀리서 보기에도 아슬아슬하고 애처로운 모습이었다. 흐르는 눈물을 훔치며 그녀는 세상에 자기들만 사는 것인양 바쁘게 움직이는 세상 사람들을 원망했다. 앞을 못 보는 아이들을 둘씩 키우는 일은 자신을 모두 버려야 가능한 일이었다.
앞을 못 보기 때문에 책을 읽어 달라고 하면 만사를 제쳐놓고 읽어 줘야 하고, 아이들이 집 안에 있을 땐 함부로 텔레비전을 볼 수도 없었다. 집안 살림과 아이들 뒷바라지를 하다가 몸살을 앓기도 했지만 한 번도 자릴 펴고 누울 수가 없었다. 그녀가 누워 버리면 그날로 당장 아이들이 학교에 나갈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입술이 바싹 마르고, 온몸이 불덩이 같아도 김씨는 아이들을 데리고 버스에 오르곤 했다. 한 번은 그런 엄마를 보고 성기가 이런 말을 했다.
"엄마, 이담에 커서 호강시켜 드릴게요."
그 한 마디가 너무 고맙고 대견스러워, 그녀는 아이 둘을 껴안고 한참을 울었다. 그후 그녀의 마음속엔 좀더 확실히 그 모든 것을 인내하고도 남을 기운이 생겼다. 두 아이들이 사회에 나가 능력을 발휘하고 제 몫을 다하며 살 수 있다면, 그 어떤 고통도 이겨내겠다는 생각, 그 다짐이 시련을 이기게 해준 것이다. 그녀의 그런 피땀 어린 노력과 사랑 탓일까? 그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성재는 정상인도 가기 어려운 대학(단국대학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해, 지금은 장학생으로 다니고 있다. 또 지난 1991년에는 미국 펜실베니아 주 오버블록 맹인학교 초청으로 1년 연수를 다녀왔다. 공부보다는 피아노를 좋아했던 성기는 고생한 부모님에게 돈을 벌어 효도하겠다며, 안마원을 열 계획에 요즘 마냥 분주하다. 두 아들을 보고 있으면 요즘은 김혜자 씨는 가슴이 아리다. 이제까지의 삶이 그래 왔듯이 두 아들의 삶이 앞으로도 편하지 않을 거란 예감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어려운 상황일지라도 인내와 노력으로 안 풀리는 건 없다고 그녀는 믿는다. 고통에 꺾이지 않는 그녀의 삶, 그래서인지 김씨 부부가 운영하는 과천 주암 낚시터의 환한 봄 햇살이 유난히 반짝거린다.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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