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첫느낌 그 설레임으로 살고 싶다
신현림 - 아득한 사랑
당신이 나를 부르는 것 같아 흰 풀뿌리 같은 목소리에 이끌려 비바람 속에서 내 발은 부푼다 비바람 속에서 당신을 찾아 떠난다 얼굴 한번 어루만지고 싶어 착한 마음 비치는 눈을 보고 싶어 멀리서 흰고래처럼 춤추는 당신 닿을 듯 닿지 않는 당신을 훔쳐만 보고 잠잠히 사라진다.
- 시 "당신이 나를 생각한다" 전문
나는 '첫사랑'이란 그 꿈 같은 용어를 붙일 만한 사랑을 했는가? 좋아하기는 했는데 그것도 사랑일까? 자꾸 의심이 간다. 굳이 구분하자면 두 번째 사랑이 첫사랑인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이 나이가 되도록 사랑이 뭔지 잘 모르겠다. 어렵기만 하다. 지나간 기억은 자기 편의대로 추려지거나 윤색되게 마련이다. 내 이야기도 내 편의대로 그려질 수 밖에 없다. 한 동안 내 마음속에 머물다 간 사람과의 인연을 기억해 보리라. 내가 처음 그리워했던 사람과의 인연은 짝사랑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 인생에서 거절당하는 기분만큼 절망스럽고 치욕스런 것도 없다. 답장 없는 편지, 호출해도 응답이 없는 전화, 주고받는 것 없이 나만 걸게 되는 전화, 내 이름이 빠진 합격발표. 그 무엇보다 짝사랑이 되어버린 인연. 그 기억은 헤비급에 속하는 고통이다. 왠지 거절당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생각만 나면 그 사람 얼굴에 물총을 쏜다거나 밀가루 반죽을 던지는 상상도 한 적이 있다. 그만큼 화가 많이 났다. 그래도 마음은 약해서 실탄이 장전된 엽총이 아니었다. 그것을 잊지 않고 밝혀둔다. 치매증에 걸려 빨리 잊고 싶던 기억은 왜 짓물러 터질 때까지 사라지지 않을까. 원래 기억이란 기분 나쁜 것일수록 인상이 깊은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기억을 고스란히 먼발치에 두고 바라볼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세월 덕분이다. 만일 그 기억마저 없다면 얼마나 심심할 것인가.
만 19세 때 나는 그를 만났다. 그는 어딘가 '페드라'의 주인공 안소니 퍼킨스보다 좀 못한 풍모였으나 아무튼 골격과 롱다리가 무척 닮았다. 그래서 그를 간편히 안소니 퍼킨스라 부르겠다. 귀여운 남자였다. 청소년기엔 귀여운 남자들에게 환호성을 지르듯, 나 또한 그랬다. 겉으론 절대 표시하지 않았다. 내숭이 유행이니까. 아니 오래된 관습이니까. 내가 알던 여자들도 그를 보면 흐뭇해 했다. 이성의 감정이 아니래도 만나면 참 기분 좋아했다. 내가 그를 처음 본 것은 휴교령이 내린 때였다. 내가 공부하러 다닌 곳에 참 많은 대학생들이 모이곤 했다. 누군가 계속 틀어대는지 모르지만 멜라니 사프카의 '더 새디스트 씽'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어두운 공간의 흐릿한 불빛 밑에서 누군가 담배를 조용히 피우고 앉아 있었다. 롱다리에다 상체가 짧아 그때는 무척 작은 사람인 줄 알았다. 내가 공부를 하다 고개를 휙 돌렸더니 담배연기 속에서 유난히도 빛나는 눈빛이 보였다. 눈에다 왁스를 발라 광을 낸 것처럼 빛이 났다. 퀭한 눈이었다. 나는 후에 처음 본 날 눈이 빛나는 그 사람을 마음속으로 계속 찾았다. 왜 찾았을까? 그건 첫인상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항상은 아니라도 말이다. 버스를 탈 경우 집에 돌아가는 방향이 안소니와 같아서 만난 많은 날들을 한께 귀가를 했다. 물론 나는 전철이 빠른데도 2,30분을 함께 가는 것이 즐거워서 빙 돌아갔다. 두 번 갈아타야 하는 번거로움을 달게 받았다. 안소니는 말라서 바람불고 추운 날이면 왠지 불쌍해졌다. "오빠, 내 윗도리 벗어줄까?" 이런 말이 나올 정도였다. 그러면 안소니 퍼킨스는 "괜찮아"라고 했다. 그래도 불쌍해 보여 바람 부는 날이면 그가 날아가면 어쩌나 걱정을 했다. 나는 그의 눈빛 만큼이나 빛나는 유머 감각을 참 즐거워했다. 친구한테 미팅시켜 주다가 내가 호감을 갖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친구한테 무척 죄의식을 갖던 기억이 난다. 다행히 그와 친구는 두 번 만나고 헤어졌다. 하지만 우린 순수하게, 때론 까불면서 선배와 후배 사이로 지냈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우연히 만나야 만남이 이루어졌다. 휴교령이 종을 치고 개강이 되자 그의 모습은 보이지가 않았다. 그러자 안소니가 궁금해졌고, 늘 그를 생각하게 되었다. 그것이 '그리움' 이었음을 깨닫는 데는 시간이 꽤 흘러서였다.
어느 가을날이었다. 안소니 퍼킨스에게서 기가 막힌 엽서가 왔다. 재치가 번득이는 그림과 함께 간단하면서도 명쾌한 글귀가 적혀 있었다. 핵심은 열심히 살라는 내용이었다. 너무나 외롭고 힘들던 때라 그 엽서는 내게 큰 위안과 기쁨을 주었다. 그래서 재치는 재치로서 화답해야 됨을 깨닫고 나도 귀여움이 번득이는 그림과 글로 엽서를 띄웠다. 그런 후 얼마 안 있어 그에게서 답장이 왔다. 내 엽서가 너무나 즐거워서 보고 또 보며, 티없이 맑다고 칭찬을 해댔다. 그 칭찬 몇 마디보다 그의 멋진 글솜씨에 놀라서 감격에 빠졌다. 그래서 또 열심히 편지 써서 보냈는데 한 달이 가도 답장이 없었다. 그때는 무답장에 상처를 입진 않았다. 이성의 감정보다 우정의 감정이 먼저 앞서기 때문이다. 후에 안 사실이지만 안소니 퍼킨스는 주변 사람들한테 엽서를 띄웠는데 나한테만 답장엽서를 받았다고 했다. 그때도 실망은 좀 했으나 그리 기분 나쁘진 않았다. 그에게서 받은 엽서와 편지는 남자한테 처음으로 받아본 거라 하루도 빠지지 않고 2년간 가방에 넣고 다녔다. 물론 연애편지는 아니지만 소중하게 여겼다. 지금 생각해도 참 글을 매력 있게 썼던 사람이다. 후에 마음 정리하려고 다 태웠지만 그냥 놔둘 걸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젠 그보다도 그의 글이 더 생각난다. 너무 잘 쓴 글이기 때문이다. 글세, 지금보면 느낌이 또 다를 것이다. 그때는 나뿐만이 아니라 동시대의 많은 남녀들이 애정표현에 서툴렀다. 그후에도 나는 글로, 엽서와 편지로 내 마음을 그에게 밀어붙였다. 여전히 내숭을 떨며 좋아하는 내색은 안하면서 경쾌하게, 언제나 후배답게 써서 몇 번 띄웠다. 답장은 카드 한 장, 편지 두 번 뿐이었다.
한번은 안소니와 성룡이 나오는 영화 '취권'을 꼬박 서서 보았다. 나는 안소니의 군대 걱정을 해주었다. 이상하게 안소니는 대꾸도 안하였다. 헤어질 때도 별말 없이 헤어졌다. 그는 집으로, 나는 그와 처음 만난 장소로 흩어졌다. 그런데 웬일인가. 안소니가 집에 가지 않고 70미터쯤 떨어진 장소에서 나를 향해 걸오오고 있었다. 그때 나는 너무나 반갑고 놀랐다. "어, 어떻게 거기서 오지? 귀신 같네?" "산 너머 왔어." 그가 산을 넘어 왔다는 사실과 그날 나와 함께 같은 버스를 타고 간 기억을 오래도록 잊지 못했다. 그 이후에 나는 안소니를 볼 수가 없었다. 이후에 나는 다른 사람과의 잊지 못할 만남과 이별이 있었다. 그래도 안소니에 대한 그리움은 가끔씩 구름처럼 천천히 움직이며 그 부피를 늘였다, 줄였다 반복하였다. 그러다 5,6년의 세월이 지난 후 스물일곱 내 생일날에 안소니를 우연히 만났다. 그와 처음 만난 장소에서. 참 묘했던 것은 한동안 나를 쫓아다닌 오빠도 함께 있었다. 나를 좋아했던 오빠도 무척 웃기고 수다도 잘 떨었는데 이상하게 말이 없었고 금방 문밖으로 사라졌다. "이상하네. 왜 저 오빠가 말이 없지?" 내가 뇌까렸다. "너 오기 전에 실컷 떠들었어." 안소니가 대답하자 나는 막 웃었다. 그리고 그 자리를 빠져 나와 안소니와 여덟 시간을 함께 보냈다. 커피숖에서 곰살궂게 얘길 나누었다. 그의 한 마디는 나를 몹시 감동시켰다. "네 생각을 제일 많이 했어." 이 말은 몇 년간 희망의 기둥처럼 자리를 차지했고 미련을 떨치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너 반찬 잘 하니?" 하며 안소니가 묻는다. "엄마가 요리학원 다니라고 그러셔서 궁중요리 배우려고 해." "웬 궁중요리?"
그가 깔깔 대고 웃는다. 가끔 엉뚱한 소리를 해서 주변을 웃기거나 '벙찌게' 만드는 내 버릇이 나오고 말았다. 소중한 자리일수록 실수를 많이 하게 된다. 특히 안소니 앞에선 더 덤벙대기 일쑤였다. 그래도 반찬 잘 하느냐고 물은 것이 나를 여자로 본것이라는 나름대로의 추측을 하며 기뻐했다. 그를 못 만나는 시간 속에서도 그간의 말들과 헤어질 때 "연락해라"는 말을 포대기처럼 가슴에 두르면서 그를 그리워했다. 물론 그 뒤로 한 번 만났으나 우린 여전히 선배와 후배 사이였다. 그의 기억이 아득하다. 또 내일은 까마득히 잊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 그에겐 관심이 없다. 그런 막연한 만남도 싫고 안소니 같은 타입도 싫어졌다. 그 이후에 남자는 많고 할 일이 많다는 걸 깨달았으니까. 그가 아직 죽지 않고 잘 살고 있다는 소식이 간간히 들려올 뿐이다.
- 신현림 1961년 경기도 의왕에서 출생하여 아주대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시집으로 '지루한 세상에 불타는 구두를 전져라', '세기말 블루스'가 있으며, 영상 에세이집으로 '나의 아름다운 창'이 있다. 현재는 상명대학교 디자인 대학원에서 사진을 공부하는 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