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첫느낌 그 설레임으로 살고 싶다
노혜경 - 저주받은 시인과의 한철
그의 어깨 돋아 있던 것은 분명 날개는 아냐. 날개라 하기엔 지나치게 선명한, 뼈에서 자라난 나뭇가지 같은 그것은, 절대로 흔들리지 않는 그것은, 거대한 그것은, 그의 어깨가 숙여질 때마다 어쩔 수 없어 슬프다는 듯 갑자기 툭 처져 버리는, 살대 꺾인 우산 같은, 그것은 어쨌든 날개는 아냐.
그럼 그것이 뭐란 말이지? 하도 오래 살아 낡은 얼굴, 나 때문에 속이 썩었다고 겹겹이 주름진 얼굴을 내보이는 어느 영혼이 덧없이 죽은 다음 내게로 덤핑이 된 무능한 내 수호천사의 어깨에 돋아난 그것은?
내 수호천사는 주기적으로 몸살을 한다. 내가 무겁다는 것이다. 밤이고 낮이고 침대머리에 붙어 앉아 거의 지워진 표정으로 날 바라보는, 그를 지치고 낡게 만든 것이 흡사 나에 대한 근심이라는 듯, 내가 걱정해 달라고 부탁한 적 없었던 내 운명에 대한 끝없는 근심이라는 듯, 어깨를 뒤집어 방바닥에 드러눕는 그.
어느 날, 그의 어깨에서 실뿌리가 뻗어 나와 슬금슬금 땅을 향해 파고드는 걸 난 느꼈어 조용히 그의 등에서 내려와 땅을 딛던 나는 업힌 것이 내가 아니라 그였음을 알았지 우리는 나란히 누워 그의 날개를 찢었어. 탈바꿈하는 곤충처럼 바삭바삭해진 날개 새 날개를 만들 수 있겠냐고 근심하는 그에게 약속했어 내가 줄 수 없는 걸 주진 않겠다고. 내가 주어야 하는 것은 꼭 주겠다고.
- 시 "지상의 평화 3 - 수호천사" 전문
첫사랑이 과거의 강박이 되어버릴 때 그것을 과연 첫사랑, 아니 사랑이라 부를 수 있을까. 기억을 아무리 반추해 보아도 있었던 현실을 돌이킬 순 없다는 환멸만이 남을 때도 그것이 사랑일까. 아마 모르긴 해도 우리가 첫사랑이라 부르는 종류의 경험은 기억이 이미 추억으로 변하고, 그리하여 상상 속에서 끊임없이 재구성되는 무해한 즐거움이 될 때에야 비로소 가능해지는 그런 무해한 즐거움이 될 때에야 비로소 가능해지는 그런 종류의 경험이다. 첫사랑의 대상이던 그와는 무관하게 오직 내 기억 속에만 남아, 필요할 때 얼마든지 편리하게 내 위주로 고쳐 그릴 수 있는, 그러면서도 하나의 양식화된 언어로 내 속에 새겨져 있는 사랑의 기억, 그것을 우리는 '첫사랑'이라 부르거니와, 그렇다면 첫사랑이란 지나가버린 역사가 아니라 되풀이되는 이야기 속에 존재한다. 인류가 자신의 기원을 로맨틱한 이야기에 담아 오래도록 반복하고 재구성하듯, 개인도 자아라는 껍질 밖으로 걸어나가 본 첫경험을 첫사랑이란 이야기 속에 담아 오래 반추한다. 불행히도, 내겐 그러한 의미에서의 아름다운 첫사랑은 존재하지 않았다.
고교 2학년 때, 나는 다른 학교의 남학생들과 시동인회 활동을 한 일이 있다. 고교 무시험 진학 첫회였던 우리 동급생들은 학교에서 얻을 수 없는 또래의 정체성을 나름의 대외 활동을 통해 찾으려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었고, 시 동인회도 그런 맥락 가운데 하나였다. J는 그 동인회의 중요한 멤버였는데, 만나고 보니 나의 초등학교 동창이었다. 시에 대해선 거의 문외한이던 내가 그들 모임에 끼게 된 것은 교지에 썼던 수필 때문이었는데, 아마 내가 동창이라서 내 글이 눈에 띄었던 것 같다. 처음 해보는 교외 동아리 활동이었고, 또 남학생들과 하는 일이라 무척 마음이 부대꼈었다. 그러나 공부밖에 모르던 당시의 내 생활에 끼여들어온 그들에게서 나는 처음으로 시라는 것의 즐거움을 배웠던 것 같다.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들이나 독일의 표현주의 시인들에 대해 내게 소개해 준 것도, 특히 보들레르와 휠데를린과 릴케를 가르쳐 준 것도 그들이었다. 내가 그들이라고 말하는 건 처음 한달이 지나기까지 나는 누가 누구인지 이름도 제대로 구별을 못했기 때문이다. 시동인회가 결성되고 한 달쯤 지났을까, 그날따라 모임장소로 예약해 두었던 청소년 회관이 착오로 자리가 나지 않았다. 남자 아이 넷, 여자 아이 다섯인 우리 동인들을 장소를 근처 중국집 골방으로 옮겼고, 장소의 분위기가 그래서였던지 곧 술병이 들어왔다. 나를 제외한 다른 멤버들은 이런 분위기가 처음은 아니었던 듯 무척 자연스럽게 어울렸지만 나는 충격을 크게 받았다. 그때만해도 나는 앞뒤가 꽉 막힌 모범생이었던 것이다. 모임이 끝나고 말없이 자리를 뜨는 나를 J가 따라왔다. 그는 내게 부담스러우면 동인회를 그만두어도 괜찮다고 했다. 있어주었으면 좋겠지만, 강요할 순 없다고. 나는 날 이해해 주려고 한 유일한 멤버인 그가 고마웠다. 내가 J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고 기억하게 된 것이 바로 그날이다.
우리는 그날 시라는 것이 무엇이며 우리가 왜 시를 쓰려 하는가에 대해 제법 진지한 대화를 나누었다. 나는 대단히 문학적이고 시에 대한 해박한 상식을 지닌 그가 부러웠으며 그는 그의 표현대로 하자면 '공부 잘하는 바보'인 내가 대견하다고 했다. 사실 나는 수학과 화학은 거의 도사급이었으므로 우리는 만날때마다 따로 한 시간씩 둘이서만 데이트를 할 것이며, 그때 서로 아는 것을 가르쳐 주기로 모종의 합의까지 보았던 것이다. J는 이렇게 해서 아주 조용히 내 삶에 끼어들었다. 처음처럼 마지막까지 그랬다면 나는 아주 행복한 기분으로 이 글을 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일은 어긋났다. 중국집에서 남학생들과 어울려 나오는 내 모습이 같은 학교 아이들에게 목격되었고, 지금보다 훨씬 엄한 규칙이 적용되던 당시 여학교의 풍토는 그런 일을 용납하지 않았다. 공부 잘한 덕에 처벌은 면했지만, 나는 동인회에서 탈퇴할 것을 치욕적으로 강요당했다. '배신' J는 동인회를 그만두겠노라고 말하는 나에게 그것은 자신에 대한 배신행위라고 말했다. 그가 눈에 파란 불을 켜고 죽어도 이 배신을 용서하지 않겠노라고 말했던 장소는 그의 문예반 선배가 하숙하고 있던 일식 가옥의 다다미 거실이었다. 중국집 같은 곳이라면 두 번 다시는! 하고 말한 내 협박 때문에 어렵사리 구한 모임장소였는데, 가슴아프게도 나는 거기서 이 모임을 그만두겠노라고 말할 수 밖에 없었다. 마음속 깊이 통증을 느꼈지만, 나는 그가 내 처지를 이해해 주었으면 하고 바랐다. 그가 언제나 제도의 바깥을 떠돌며 살아온 말하자면 불량학생이라는 것을 내가 비난하지 않았듯, 내가 제도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는 모범생이라는 것이 그의 비난의 표적이 되지 않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았다. 나는 그날의 J를 오랫동안 기억했다. 배신이라는 말을 남기고 방을 박차고 나가버린 뒤 내 얼굴로 쏟아지던 다른 사람들의 의혹서린 눈길과, 막상 내가 현관으로 나왔을 때 비에 젖었던 내 신발을 말려서 가져다 주었던 일, 봄태풍이 밀어닥치는 거리로 나설 때 입었던 교복을 벗어주고 우산을 씌워 주었던 일을 두고두고 생각해 보곤 했다. 결국 그는 한없이 정에 굶주린 상처받은 소년에 지나지 못했던 것을, 그날의 내겐 그것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다만 동인회를 그만두고 싶었을 뿐인데, 그리고 그건 제가 먼저 꺼냈던 말이기도 했었는데, 어째서 내가 너를 배신한 게 되냐고 나는 항변하고 싶었다. 그러나 버스 정류소까지 가는 동안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더 나빴던 것은 내 머리 위에만 우산을 씌우고는 자신은 고스란히 비를 맞으며 내내 걸었던 일이다. 결국 내 마음속을 가득 채운건 이 모습이 나를 향한 시위라는 분함이었다. 사실 그것은 일종의 폭력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그래, 그럭하자꾸나. 배신이라면 배신해 주지. 다시는 널 안 볼 거야, 라고. 그의 시위에 맞서 내 마음은 부르짖고 있었다.
그러나, 동인 모임에서 빠져나온 얼마 뒤 나는 그에게 연락을 했다. 핑계는 우산을 돌려주기 위해서였지만, 사실은 '배신'이라던 그의 말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던 것이다. 도대체 내가 너의 뭘 배신한 거냐고 묻고 싶었다. 만나고 나니 그는, 내게 그런 폭언을 퍼부은 적이 언제 있었냐는 표정이었고, 부끄럼 타는 아이처럼 계속 웃기만 했다. 내게 남자친구란 것이 생기려고 한다는 것과, 그 상대가 바로 J가 될 거라는 사실을 나는 그날 깨달았다. 이것은 또 다른 종류의 고민거리였다. 우리는 서로의 삶의 형태와 관습을 이해하기엔 너무 다른 세계의 사람이었고, 나는 거의 온실 속의 화초나 다름없는 어린 소녀에 지나지 않았다. 내게 그는 너무 미지의 존재였다. 한 달 남짓 동인 모임에서 만나는 동안 그에게서 느낀 기묘한 어둠의 분위기와 그의 주변을 늘 맴도는 다른 여자아이들의 존재도 그를 향해 싹터 오른 약간의 호감을 잠재우기에 충분했다. 맨처음의 남자친구가 틈만 나면 학교를 무단결석하고 거의 알콜중독자에다 내놓고 담배를 피우는,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그런 아이라는 걸 부모님이 아시면 뭐라고 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를 아주 피해버린 것은 아니다. 사실은, 나는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어떤 문학적 열기를 도저히 뿌리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이런 식으로 가다간 싫든 좋든 헤어나오지 못하게 되리라는 걸 의식하게 되면서, 나는 점점 더 공부에 매달렸다. 그가 나를 만나기가 어려워졌다.
어느 날, 도서실에서 공부하고 집에 돌아오니 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J라는 애가 여섯 시부터 버스정류소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나가 보라고. 집에 와서 기다리래도 막무가내이니 가서 만나보고 오라고.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의 밤 열한 시였다. 내가 망설이자, 아버지는 다시 권하셨다. 다급한 일이 있길래 그러겠지. 무슨 일인지 몰라도 사람 대접을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교복을 입은 채로 뛰어나갔다. 속이 부글거렸다. 겨우 그를 만났을 땐 거의 자정이 다 되었을 무렵이었다. 나를 자기 집에 데려가야 한다고, 할아버지에게 그렇게 약속했다고 그는 말했다. 열한 시 오십 분에. 나는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이 미련퉁이, 멍청이, 내가 왜 너의 집에 가야 해? 그것도 이 시간에. 그는 할머니 할아버지와의 약속이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나중에, 나중에야 알았다. 그의 조부모님과의 약속이 J에게 어떤 의미였던가를. 집에서 내버리다시피 한 불량소년인 그를 보살피고 감싸준 그분들에게, J는 착실한 학생이 되겠노라고 약속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증거로 착하고 단정한 여자친구를 보여주겠노라고, 단 한번도 제대로 약속을 지켜본 일이 없던 손자가 이번만큼은 보여드리겠노라고. 그것이 집앞에서 여섯 시간을 기다린 이유였는데, 그 늦은 시간은 내게 납득할 만큼 여유를 주지 않았다. 이해할 수 없도록 절망한 표정으로, 그는 내게 이렇게 물었을 뿐이다. 나를 믿지 못하는 거냐?라고. 빛이라곤 단 한점도 없던 그의 눈과, 허물어지기 직전의 축대같던 그의 어깨가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는 완전한 무방비 상태로 내 앞에 서 있었다. 내 마음의 한구석에서 한없는 연민의 손이 그를 향해 뻗어나가고 싶을 만큼. 그러나 공포가 밀려왔다. 이 유혹에는 어딘가 죽음의 냄새가 난다고, 거기 빠지면 끝장이라고 누가 징을 쳤다. 야, 정신차려, 넌 고등학교 2학년짜리야, 임마! 나는 천천히 또박또박 대답을 했다. 믿지 못한다고. 나는 너를 잘 알지 못한다고. 우린 겨우 몇 번을 만났을 뿐이라고. 어리고 난폭한, 그리고 막 화살에 맞아버린 야수 같은 그의 영혼은 날뛰기 시작했다. 주먹이 사정없이 날아들었다. 내가 예견한, 그리고 예견하지 못한 반응이었다. 아프고, 슬펐다. 그리고. 넋이 나가버린 나를 그가 껴안았다. 곧 내 입술 위에 그의 입술이 얹혔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슬프기 짝이 없는 장면이다. 내가 널 이렇게 사랑하는데, 라고 그가 말했지만, 나는 알았다. 이것은 사랑이 아니라 폭력이며, 지배하고 소유하려는 욕망이라는 것을. 심장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팠다. 적어도 이렇게 하지 않았어야 했다. 언젠가 너하고 진짜로 최초의 입맞춤을 하게 될 것이 우리 운명이었다 하더라도 이런 식으로 탈취되어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넌 알고 있니? 난 절대로 너를 사랑하게 되지 않을 거야. 나는 겨우 이 한마디만 입밖에 내어 중얼거렸을 뿐이다. 꼭 이래야만 했니?라고.
우리 집 앞에 도착했을 땐 자정이 넘어 있었다. 그는 집 옆 담벼락에 기대어 흐느껴 울었다. 이렇게 하여 나는 마음속으로 J와 완전히 결별해 버렸다. J는 그 뒤로도 한참을 방황했다. 가정형편과, 충동적인 성격과, 상처받은 자존심이 그를 정상 바깥의 생활로 내몰았던 것이다. 나의 '날카로운 첫 키스'가 추억의 저편으로 사라지기까지 그는 주기적으로 나를 찾아오곤 했으며, 더불어 그의 여자친구를, 아니 애인을 자처하는 아이들이 나를 찾아다녔다. 그의 친구들, 선배들, 그의 주변을 맴돈 여자들은 나를 알고 있었다. 나는 그의 공식적인 두 번째 여자였다. 그의 첫 번째 여자는 수시로 바뀌었지만, 나는 부동의 작은집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가 내게 한 복수의 일부에 불과했다. 그리고 나도, 그에 관한 한 마지막 연민의 한 조각까지도 지워 없애는 것으로 복수를 했다. 어리석게도. 나중에, 내게 진짜로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을 때, 그러한 소문을 듣고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던 그가 나를 찾아온 적이 있다. 우리는 플라타너스 잎이 무성한 가로수 아래를 말없이 걸었고, 걷는 동안 나는 그에 대한 내 미움이 많이 사라지고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마도 진짜인 사랑의 힘이 나를 온화하고 너그럽게 만든 것이리라. 어쨌든, 그가 내게 저지른 수많은 폭력은 궁극적으로는 자기 자신을 향하던 과정에서 나온 것이다. 내게 대한 그의 사랑이 아무리 난폭하고 비정상적인 것이었다 해도 그 진실함만은 받아들였어야 했다는 것을 나는 인정했다. 그리고 한 달쯤 뒤, 그는 저세상 사람이 되었다. 동아리의 MT를 갔다가, 물에 빠진 여학생을 구하고는 심장마비를 일으켜 익사해 버린 것이다. 인생의 마지막을 이타적으로 마감하고는 떠나버린 셈이다.
그의 이야기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쓸 수도 있었으리라. 그랬다면 그의 의미, 내 인생의 구겨진 한 페이지가 펴지기라도 했을까? 아니다. 나는 지금 오랜 세월 갚지 못해 온 부채를 갚기 시작한 기분이 든다. 그는 따지고 보면 나를 시의 길로 인도한 장본인이었고, 사랑이 권력이나 소유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 반면교사이기도 했다. 나는 지금의 남편을 대학 1학년 때 만났는데, 이 사람이야말로 문자 그대로의 내 첫사랑이다. 오그라들 대로 오그라든 내 마음을 열어주고, 따뜻한 신뢰로 채워준 사람이 바로 남편이 되는 행운을 나는 지켜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J의 이야기를 써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이 글을 쓰려고 생각하는 동안 내내 나를 괴롭혀 온 부채감 때문이었다. 나는 일생 내내 그가 폭력으로 나를 소유하려 했다고 믿어 왔지만, 사실은 사랑이라는 것을 무기로 하여 그를 노예로 소유하려 했던 것은 내가 아닌가? 사랑하려 하기 전에 사랑받기를 먼저 배우는 자가 빠지는 함정, 그것에 나도 빠졌었던 것은 아닌가? 그리하여 비로소 나는 그를 나의 공식적인 첫사랑으로 인정할 마음이 생긴다. J에게 말하고 싶다. 정말 미안하다, 라고.
노혜경 1958년 부산에서 출생하여 부산대 국문학과 및 동 대학원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현재 부산대 국문학과 강사로 있으며, 시집으로 '새였던 것을 기억하는 새'가 있고, 공동 저작으로 '한국 현대시와 패러디', '한국 서술시의 시학'등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