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첫느낌 그 설레임으로 살고 싶다
양선희 - 나를 이끈 손
너는 캄캄할 때, 온다. 한 길로 가는 마음 같은 줄을 타고,
오래 고름을 짜낸 생에 경계 없는 길을 들인다.
삶의 노래 내 안에 물결치고
노화하며 내 몸 울음 재우는 집이 된다.
- 시 '사랑아'전문
사랑에 대한 정의는 무수히 많다. 어떤 이는 눈으로 보지 않고 마음으로 보는 것이 사랑이라 했고, 또 어떤이는 인간의 주성분이 사랑이라 했고, 또 어떤이는 외투보다 추위를 더 잘 막아 주는 것이 사랑이라 했고 또 어떤 이는 우리 인생의 훌륭한 선생이 바로 사랑이라 했다. 인생을 먼저 경험한 사람들이 내린 사랑의 정의 중에서 청소년기의 내가 매혹당했던 것은 '사랑은 더 넓은 곳으로 나를 불러 내는 것'이라는 정의어이다. 릴케의 글을 읽다가 발견한 사랑에 대한 부분을 내 나름대로 정리한 문장이다. 결혼을 하기 전까지 줄곧 나는 릴케식의 정의로 사랑을 재단했다. 나를 더 넓은 세계로 불러내어, 내가 사랑을 하기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보게하고, 경이로운 느낌들을 갖게 하는 것. 그것이 사랑이라고 의심없이 믿었던 것이다. 물론 내가 사랑에 빠졌을 때 나를 더 넓은 세계로 불러낸 것은 내가 사랑을 느낀 그 존재 자체일 수도 있지만, 그 존재를 사랑하는 나 자신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드넓은 세계로 불러낸 것은 내가 사랑을 느낀 그 존재 자체일 수도 있지만, 그 존재를 사랑하는 나 자신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드넓은 세계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내어주는 것은 역시 사랑의 감정이기 때문에 나는 즐거이 사랑의 손에 이끌려 새로운 세계를 맛보곤 했다. 새로운 세계에서 내가 새롭게 느끼는 감정들 속에는 늘 신비로움과 환희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인생에 대해, 사랑에 대해 깊은 성찰을 요구하는 쓰디쓴 맛들과 견디기 힘들어 생명을 포기하고 싶을 정도인 고통과 슬픔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낯설지만 아름다운 세계로 나를 불러내는 사랑의 감정들을 사랑했다.
릴케식의 사랑의 정의에 어울리는 나의 첫사랑을 만난 것은 내가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이었다.초등학교 5학년 때 어머니날 기념으로 어머니에 대해 썼던 산문이 교무실 앞 복도에 게시됐던 이후부터, 글을 쓰는 일에 큰 관심을 가졌던 나는 중학교 때부터는 밤을 새워 쓴 시를 '새농민' 이란 잡지의 독자란에 투고하곤 했었다. 아버지가 농협에 근무하셨기 때문에 나는 그 잡지를 손쉽게 접할 수 있었는데, '어린이 새농민'을 두고도 굳이 성인 잡지인 그 책의 독자란에 글을 보냈던 이유는 아버지께서 농촌의 대다수 어른들이 보는 그 잡지에 활자화되어 있는 글을 보는 일을 큰 기쁨과 자랑으로 여기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거의 매달 시를 써서 '새농민'에 보내곤 했었다. 잡지가 그다지 많지 않던 시절이었고, 지금보다는 순수한 시대라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새농민'에 내 시가 실리면 그 시를 읽는 독자들로부터 수많은 편지가 오곤 했었는데, '시골 소녀'라는 제목의 시가 수록됐을 때는 다른 때보다 더 많은 분량의 편지가 날아와 답장을 보낼 편지와 보내지 않을 편지를 분류해서 두 개의 라면 상자에 나누어 담았었다. 그런데 답장을 보낼 편지들이 담긴 바로 그 상자에 들어 있던 편지의 발신인 중 한명이 바로 나의 첫사랑이 되었던 것이다. 내가 M의 편지를, 답장을 보낼 편지로 분류했던 것은 그의 편기가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멋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편지들은 자신이 읽은 내 시에 대한 느낌과 시를 쓴 나에 대한 여러 방면의 추측, 혹은 자기를 소개한 내용들로 여러 장의 편지지가 채워져 있었지만 그의 편지는 봉투부터 달랐다. 나의 호기심을 유발시키기 위해서였는지 편지 봉투에는 발신인의 주소가 없었고, 편지지도 그 시대의 흔히 쓰던 양면돼지가 아니라 백지였다. 백지의 5분의 4정도를 여백으로 둔 하단에 '위의 여백에 나의 마음을 담아 보냅니다'라는 정성을 다한 펜글씨가 깨끗하게 적혀 있었고, 뒷장에는 그의 주소가 적혀 있었다. 편지의 형식이 워낙 개성적이었던 탓에 그 주소는 마치 신기루처럼 느껴졌었다.
M의 첫 편지에 오래 마음을 빼앗겼던 나는 곧장 답장을 썼다. 그때 나는 주로 여러 종류의 말린 꽃잎을 붙여 꾸민 종이를 편지지로 사용했었다. 그의 두 번째 편지를 통해 나는 그가 서울대학교에 낙방하여 재수를 하고 있는 수험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가 성인잡지에 시를 투고했었기 때문에 내게 편지를 보냈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를 자기 또래의 성인으로 여겼듯이,M역시 막연하게나마 나를 그렇게 알고 있었지만 나는 내가 곧 여고생이 될 신분이라는 것을 금방 밝히지는 않았다. 그의 존재에 대한 성찰이 더 있고 난 다음에 나는 나의 신분을 밝힐 참이었다. 문학적이고 섬세한 문장의 그의 편지를 서너 통 받아 읽은 뒤 그가 편지교류를 계속해도 좋을 사람이라는 나름대로의 판단을 내린 나는 나의 신분을 밝힌 편지를 보냈다. 그랬더니 그 이후에 온 그의 편지는 높임말이 예삿말로 바뀌었고, 미지의 또래 여인을 대하듯 하던 문체는 여동생을 대한 듯한 친근한 문체로 바뀌어 있었다. 내가 그보다 한참 손아래라는 것을 밝힌 이상 나 역시 그때부터는 그를 'M씨'하는 호칭 대신 '오빠'라 불렀고, 서로의 사진을 주고 받으며 환 상의 세계에서 현실의 세계로 한발 내려왔다. 그 뒤에 그는 내게 '세상에는마음으로 봐야 될 것이 더 많다'는 편지와 함께 생떽쥐페리의 '어린왕자'를 선물했고, 나는 그에게 손수 한 땀 한 땀 수를 놓은 베갯잇을 보냈다. 나중에 안 얘기지만 그는 내가 보낸 선물의 용도를 몰랐었다고 한다. 그의 대학진학과 아버지의 임종이 맞물려 있었던 터라 장남이던 그가 원하던 대학에로의 진학을 포기하고 그가 주거하던 지방대학의 행정학과에 입학을 했다. 그가 대학생이 된 후에도 편지를 통한 우리의 만남은 계속되었다. 그는 편지를 통해 자신이 쓴 형이상학적인 시들을 들려 주기도 하고, 괴테며 릴케, 폴 발레리, 앙드레 지드, 조르주 상드, 버지니아 울프, 키에르 케고르 같은 사람들의 세계를 엿보게 해주었다. 식구들이 밥을 먹는 동안에도 이불을 뒤집어 쓰고 손전등을 켜 들고 책을 읽을 정도로 독서를 즐기던 나였지만, 우리 나라 작가들이 아닌 외국작가들의 이름과 작품은 거의 그를 통해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로 인해 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이며 막스 뭘러의 '독일인의 사랑', 앙드레 지드의 '좁은문', '여자의 일생',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와 같은 책들을 떨리는 가슴으로 접할 수 있었다.
그는 늘 내게 '책 속에 모든 길이 있다'라고 말했기에 대학진학의 압박을 받지 않은 여고시절을 보냈던 나는 그가 권하는 책을 읽고, 사색하고, 시를 쓰고, 거의 매일 그의 편지를 읽고 답장을 쓰는 일들로 즐거운 나날을 보내곤 했다. 편지를 통해 그는 자신이 나보다 먼저 알게 된 삶의 다양한 표정을 나에게 보여 주었고, 깊고 맑은 지혜의 샘물을 길어 내 목을 축여 주었고, 나는 그가 나에게 주는 것들을 내 성장의 자양분으로 삼았다. 그 시절의 내가 뿌리도 잘 내리지 못한 한 그루의 어린 나무였다면, 그의 존재는 나무가 뿌리를 튼튼히 내리게 하고 꿈을 키우며 푸르게 자라게 하는 영양분 많은 흙이며 한없이 부드럽고 따스한 햇살이었다. 그는 나의 우상이었다. 나보다 박식하고 나보다 시를 잘 쓰고..... 모든 면에서 나보다 우월해 보인 그를 나는 숭배했다. '나는 언제쯤 그 같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열심히 읽고, 쓰면서 마음의 정원을 아름답게 가꾸려고 애썼다. 한창 이성에 눈을 돌릴 시절이었지만 나의 마음은 늘 그를 향해 있었다. 태양이 되고 싶어 태양만을 보며 자라는 해바라기처럼. 그는 내 삶의 지주였고, 내 영혼의 지배자였고 나를 키우는 영양제였다. 그러나 내 영혼의 키가 조금 자랐다 싶으면 그의 영혼의 키는 언제나 나보다 더 훤칠하게 자라 있어서 나를 안타깝게 했고, 나를 더 열심히 살게 만들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바꾸어 놓는다. 부드럽고 향그러운 흙과 같은 가슴을 지닌 사람이든 황무지같은 가슴을 지닌 사람이든 그 가슴에 사랑이 민들레 씨앗처럼 날아들어 뿌리를 내리면 그 사람은 어떤 식으로든 변한다. 생기가 도는 표정이나 정감이 넘치는 말씨, 약간 들뜬 듯한 행동뿐 아니라 사물이나 대상을 보는 시선도 한결 부드러워진다. 사랑의 씨앗이 눈을 떠 껍질을 깨고 떡잎을 내밀 때쯤이면 그 사람은 자신에게 그 보배로운 선물을 준 존재를 닮으려고도 한다. 서로 이질성을 인정하는 것이 사랑이라고는 알고 있으나 동질성을 지니려고 안간힘을 쓰기도 하는 것이다. 그 사람이 즐겨 마시는 차를 따라 즐기고, 그 사람이 즐겨 가는 장소를 따라 즐거이 찾고, 그 사람의 취향까지도 닮으려는 헛되지만 예쁜 노력도 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M을 만났던 시절에 '나는 그를 사랑한다'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었다. 오직 같은 하늘 아래 그의 존재가 있다는 것 자체가 희열일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를 닮으려고 했었다. 그는 자신이 염세주의자라고 했었다. 그런 단어를 그로부터 처음 들은 나는 사전을 펼쳐보고서야 세계나 인생을 가치가 없는 것이나 무의미한 것, 아름답지 않은 것으로 보는 인생관을 가진 사람이 염세주의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물론 그때 나는 낙천주의적인 기질을 가지고 있었고, 그 동안 그가 보내온 편지들을 통해 나름대로 내가 파악한 바에 의하면 그 또한 지나친 염세주의자는 아닌 듯했다. 그러나 그가 자신을 그렇게 평가한 이상 나도 염세주의자가 되려고 노력해야만 될 것 같은 유치한 생각을 했었다. 외적으로 나타난 그 징후는 우선 옷을 살 때 유채색보다는 무채색을, 채도가 높은 것보다는 채도가 낮은 것을, 새 느낌을 주는 옷보다는 누가 몇 번 입었다 벗어둔 듯한 헌옷을 고르는 것이었다. 그리고 내적으로 나타난 그 징후가 있다면 그것은 우선 미래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한순간도 꿈을 버린 적이 없었던 지난날들을 생각한다면 그런 생각은 이율배반적인 것이었겠으나, 나는 그의 생각처럼 미래는 없으니 늘 현재에 충실하게 살아야 된다고 믿었고, 그렇게 행동했다. M은 그렇게 청소년기의 내 인생의 표정을 바꾸어 놓았고, 나의 삶을 풍요롭게 한 존재였던 것이다. 얼굴을 보지 않고 주고받는 편지라는 것이 상대방에 대한 환상을 키우기에는 알맞은 형식이든가? 그 시절 M과 내가 주고받은 편지는 때로는 일반적인 편지의 형식을 빌려 썼지만 대부분은 일기 형식이었다. 일기라는 것은 자기내면을 비추는 은밀한 거울이라면, 그 거울에 비친 고백의 얼굴 같은 것을 함께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벽이 없는 가까운 느낌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M과 나도 마찬가지였다. 한번도 만난 적은 없었지만 서로의 마음 풍경은 누구보다도 잘 알았기에 서로 근친과도 같은 친근한 느낌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아마 우리가 편지를 주고받지 않고 현실에서 자주 만났더라면 서로에 대한 환상이 쉽게 깨져 오랜 만남을 유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경상도와 충청도란 지리적인 거리는 우리를 그런 불행으로부터 보호해 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에게도 서로를 신비의 베일에서 벗어나게 할 날이 찾아왔다. 지금은 소설가가 되어 서울에 살로 있는 6촌 언니가 한 명 있는데, 그림을 잘 그리고, 영화에 나오는 여자주인공처럼 예쁘게 꾸미고 다니던 그 언니는 일찍 결혼을 해서 딸 쌍둥이를 낳았었다. 그런데 우연히도 그 언니의 시가 쪽 친척이 M이 사는 도시에 살고 있었고, 언니가 혼자 그곳에 갈 일이 생겼는데 어린 두 아이를 데리고 가기가 힘들다며 나에게 동행을 부탁해 왔던 것이다. 나는 구름 위를 걷는 기분으로 기꺼이 언니를 따라나섰다. 그 도시에 도착한 나는 저녁 무렵에 그에게 전화를 했고, 그는 내가 있는 곳과 가까운 장소인 석유창고 앞에서 만나자고 했다. 그러나 그 도시가 초행이었던 나는 끝내 약속장소를 찾지 못했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낯선 거리를 헤매다가 서점에 들러 그에게 전화를 했다. 그러나 서로 만나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라 그는 내게 폴발레리의 시집을 한 권 사서 읽으라는 권유로 만나지 못한 첫 만남을 위로해 주었다. 그 이후에 나는 그의 얼굴을 길거리의 벽보에서나 볼 수 있었다. 운동권에 투신해 어두운 한 시대를 밝히는 데 한 줄기 빛이라도 더하고자 했던 그는 지명수배자 명단에 올라 있었던 것이다. 교도소를 들락거리고, 도피생활을 하느라 편지를 주고받는 일이 뜸해졌던 어느 날 그는 내게 마지막 편지라고 단언한 한 통의 편지를 보내 왔다. 그때 나는 여고를 졸업하고 상경해 직장생활을 할 때였다. 자신의 처지 때문에 나와의 만남을 계속하면 나를 세속적인 형태의 불행에 빠뜨릴 것 같다는 내용의 마지막 편지. 그 편지를 읽으며 나는 울고 또 울었다. 눈물과 한숨에 젖은 나날을 오래 지속하던 나는 마음의 상처를 아물게 하기 위해서는 그에 대한 기억을 지워야 된다는 생각으로 그가 내게 보냈던 수백통의 편지를 한 장 한 장 불에 태웠다. 그의 존재는 그렇게 한줌의 재로 남게 된 것이다.
결혼을 두고 흔히 '새로 태어나는 것' 이라고들 한다. '가정'을 갖고 나면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이나 생활의 태도 등이 '가정'을 갖지 않고 떠돌 때와는 많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결혼을 하기 이전의 사람들이 뿌리 없이, 혹은 헛뿌리만 내리고 환상 속을 붕붕 떠다닌다면 결혼은 그들을 현실에 단단히 뿌리를 내리게 하는 것이 아닐까? 결혼과 함께 사랑에 대한 나의 생각도 많이 바뀌었다. 결혼 이전에는 나를 넓은 세계로 불러내는 것만이 사랑이라고 믿었었지만, 사랑은 그렇게 한 가지 표정만을 지닌 것이 아니라 수만 가지의 변화무쌍하고 신비로운 표정을 지니고 있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두 아이의 엄마가 된 오늘까지 나를 더 넓은 세계로 이끈 사랑의 손길들에게, 그러나 축복을.....
양선희 - 1960년 경남 함양에서 출생하여 1984년 서울예전 문창과를 졸업했다. 1987년 '문학과 비평'으로 등단했음며, 198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나리오 '집으로 가는 길'이 당선되었다. 시집으로'일기를 구기다'가 있으며, 장편소설로 '사랑할 수 있을 때 사랑하라'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