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첫느낌 그 설레임으로 살고 싶다
김상미
파랑새
-과거는 시작의 시작일 뿐이다. 그리고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있어 온 것들은 앞으로 올 새벽의 여명일 뿐이다.(H.G.웰스)
나는 그와 헤어졌다. 어제와 헤어지고, 어제의 섹스, 어제의 거짓말, 어제의 눈부신 하늘과 헤어 졌다. 나는 오늘의 단단한 붉은 벽돌 속에 박혀, 웃는다. 모든 웃음은 어제의 눈물이다. 어제의 그리움, 어제의 오독, 어제의 분노이다. 나는 그와의 교감을 끊었다. 진부한, 모두가 가는 그 길을 이탈했다. 나는 내 가슴에 켜져 있던 촛불을 껐다. 언제나 삶을 선호하게 만들던 뜨거운 심장 속의 피를 모두 뽑아버렸다. 모든 밧줄과 엉킨 매듭과 고리들을 끊어 버렸다. 액자에 같혀 벽에 걸린 그림처럼 나는 움직이지 않는 하나의 개념 속으로 들어갔다. 나는 포장된 상자 속의 선물, 나는 나를 사방으로 퍼뜨린다. 모든 선물상자는 살아 남은 자들의 것. 나는 웃으며 나를 집어올리는 그들을 본다. 어제의 두개골인 어제의 바람이 나를 붙잡으려 데구루루 굴러오는 것을 본다. 그러나 이미 늦은 새벽, 그 누구도 어제의 바람으로 오늘을 씹어 삼키지 않는다. - 시 '늦은 새벽'전문
나는 그를 오빠라고 불렀다. 오빠, 나의 오빠.그러면 그는 그의 커다란 호주머니 속에서 손수건을 꺼내 내 눈물을 닦아주었다. 눈물을 통해 나는 그에게로 갔다. 그의 얼굴에는 모든 하늘이, 그의 가슴에는 모든 이들의 목소리가 들어 있었다. 그는 세상이었고, 나는 언제나 세상의 바깥쪽에 있었다. 오빠, 나의 오빠, 나를 세상으로 들여보내 주세요. 아무리 애원하여도 그 세상엔 내 자리라는 게 없었다. 나는 그를 오빠라고 불렀다. 똑 같은 피가 흐르는 남매, 혈육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야만 그에겐 부인이 있고, 아이가 있다는 게 수긍이 갔다. 해서는 안 되는 근친상간처럼 내 사랑 또한 불륜이라는 걸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그럼에도 내게는 하나의 얼굴만이 있었다. 수천의 얼굴들 속에 불켜진 하나의 얼굴. 나는 그 얼굴에 손가락을 대고 푸른 실핏줄 사이로 스며 나오는 기쁨, 분노,고독, 슬픔 등을 들이마셨다. 그러면 그가 샅샅이 보였다. 햇빛에 반짝이는 반백의 머리카락, 생기 만발한 웃음소리, 한 웅큼 공기를 쥐고 있는 손바닥...... 사랑이란 물 흐르듯 그렇게 가는 것이라고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렸다. 물 흐르듯 가는 것. 그런데도 내 사랑은 왜 이렇게 끝이 없고, 한도 없고, 원도 없는 것일까? 한 권의 두꺼운 책처럼 아무리 페이지를 넘기고 넘겨도 왜 이렇듯 끝 페이지가 나오지 않는 것일까? 나는 그를 따라 그가 있는 서울로 왔다. 몸과 마음에 지옥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오히려 그 지옥 때문에 마음이 편했다. 마치 내 방에 있는 것처럼 편했다. 어차피 지옥에서 한 발짝도 떠날 수 없는 게 인생이라면, 그 끔찍한 지옥이 나의 선이 되도록 하리라 결심까지 했다. 끝간 데 없는 지옥에서 천사처럼 살아가리라 다짐했다. 하여 그가 나를 울릴 때도, 세상 밖으로 나를 밀어내어 한없이 초라하게 만들 때도, 절대 그를 비난하거나 분석하거나 방어하지 않았다. 나는 그가 내 주변에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하여, 나를 숨김없이 털어놓고, 숨김없이 보여주었다. 그는 나의 오빠, 나는 그를 오빠라고 불렀다. 똑같은 피가 흐르는 남매, 혈육이라고생각했다. 그런식으로 나는 그에게 향하는 마음을, 열정을 다스렸다. 오빠를 연인으로 생각하는 건 죄다. 그 건 사랑이 아니라 근친상간일 뿐이다. 끊임없이 나를 달래고 달랬다.
나는 차츰 그에게로 얽히는 모든 감정에서 자유로워지기 시작했다. 나도 놀랄 만큼 친밀한 객관성을 유지하게 되었다. 우리는 정말 남매 같았다. 큰오빠와 막내 여동생. 쉴러나 셰익스피어, 몰리에르가 알면 혀를 내두를 만큼 우리는 어떤 비극 앞에서도 의연할 수 있었으며, 서로를 믿고, 잘 이해하였다. 나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그를 사랑했다. 내 사랑이 가야 할 슬픔의 길을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하게 쑥쑥 걸어갔다. 나는 점차 서울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그가 내게 주는 절망보다도 서울이 내게 주는 고독이나 쓸쓸함 들이 휠씬 내게는 감미롭고 덧없이 나를 아득하게 만들었다. 사랑은 완전한 공범관계이다. 우리는 사랑에 관해서는 철저한 공범자였다. 우리는 사랑이 이끄는 대로 희망과 절망의 끝까지 따라다녔다. 그러나 그는 가정이 있었다. 모든 이들이 노래하는 '즐거운 나의 집'이 있었다. 파괴할 수 없는 거대한 심연-그게 가정이고, 가족들이다. 피로 얽힌 괴물들이 내쉬는 숨결 때문에 나는 숨이 막혔다. 그런데도 부도덕한 건 나였고, 세상 밖으로 굴러떨어지는 건 나였다. 그는 집으로 돌아가면 그뿐이었다. 마시다 만 커피처럼 차디차게 식어가는 나를 남겨둔 채, 커피 물이 절절 끓는 그의 가정으로 돌아가면 그뿐이었다. 안락한 평화의 집으로.....
파랑새. 그는 나를 파랑새라 불렀다. 어디서 이런 예쁜 파랑새가 내게로 날아왔을까?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그가 나를 파랑새나 나비로 부를 때마다 왠지 슬퍼졌다. 날개 달린 것들은 언젠가는 휠휠 어디론가로 날아가 버린다. 그가 나를 붙잡지 않는 이유도, 언젠가는 내가 휠휠 어디론가로 날아가 버릴 것이란 예감 때문이다. 하여 나는 그가 나를 파랑새나 나비로 부르는 게 싫었다. 그냥 그의 말대로 물 흐르듯 흘러가고 싶었다. 그러나 내겐 불꽃이 필요했다. 자꾸만 야위고 비워 가는 내가 안쓰러웠다. 나는 타오르고 싶었다. 남김없이 나를 태우고 싶었다. 살아 있는 육체가, 영혼이 되고 싶었다. 나 스스로 흘리는 눈물과 웃음 속에서 인생을 만지고 껴안고 싶었다. 손님처럼 왔다가 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게 싫었다. 조각 조각 껴맞추어 만든 사랑이라는 낱말이 싫었다. 나는 마치 사랑으로 불타 버린 집을 고치러 온 건축 견습공 같았다. 나는 슬프고 불행했다. 모든 게 헛된 욕망 같아 보였다. 석양에 사라져버리는 희미한 그림자. 너는 알까? 네가 언제 올지, 내가 너를 얼마나 기다려야 할지를 너는 알까?......
언제부터인가 나는 기다리는 걸 포기했다. 그와 함께 오르던 계단에서 걸음을 멈추고, 그곳에서 뛰어내렸다. 나는 무섭게 단순해졌다. 모든 길을 성큼성큼 걸었다. 그가 불러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나는 내 앞에 놓인 거울만을 응시했다. 나는 내게 있는 모든 것들을 그에게 다 주었다. 내 사랑, 내 책들, 내 음악, 내 불행, 내 피까지도 그리고 그가 부르면 어디든 달려갔다. 낮이든 밤이든 불을 끄지 않고 기다렸다. 그러나 이제 나는 그 모든 것들을 포기했다. 그와 함께 가꾸고 싶었던 '즐거운 나의 집' 에 대한 환상을 바닷속에 처넣었다. 인생이 내게 일구라고준 모든 불들을 끄고, 나는 어디든 혼자서도 쑥쑥 걸어갔다. 그는 나에게 줄 것이 없었다. 아니, 처음부터 아무것도 줄 것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내 인생을 들고 그에게로 갔지만, 그는 내가 읽는 책들처럼 언제나 내 인생 밖으로 지나갔다. 나는 공허한 바람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그를 사랑했다. 그의 사랑을 붙잡고 활활 타오르려고 안간힘을 썼다. 차갑고, 그립고, 서글픈 파도소리가 내 온몸을 소리치며 밀려갔다. 밀려오면서 내 몸에서 나오는 불꽃들을 모조리 다 꺼 버렸다. 나는 바다 깊이 파묻혀 버렸다. 청춘을 낭비한 죄, 나는 난파당한 배에 불과했다.
오빠, 나의 오빠. 나는 혼자서 조금씩 나는 연습을 했다. 그가 예감한 대로 나는 그를 떠나 어디론가 날아가야만 했다. 자생력을 회복해야만 했다. 얼굴 한복판에 날개를 펄럭이며 거대한 우주를 향해 날아가야만 했다. 나는 무섭게 인생에 매달렸다. 내 위치로 다시 돌아가야 해. 날마다 들판을 달리고, 물속을 헤 엄쳤다. 그런 나를 향해 그는 소리쳤다. 다른 여자들이랑 똑같아지려 한다고, 그건 너의 스타일 이 아니라고. 하지만 오빠, 나의 오빠. 나는 이제 오빠와 놀지 않겠어요. 맨날 술래가 되어야 하고, 맨날 되어 주기만 해야 하는 게임, 이젠 싫어요. 사랑이라는 연못 아래에서 그대로 얼어버리는 내 감정, 내 꿈들, 내 절망들이 불쌍해서 이제는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요. 파랑새처럼 날아갈래요. 어두운 창공에 걸려 그대로 그대로 제가 될지라도 하늘로 휠휠 날아갈래요.
어떤 면에서는 절망이 위안이 될 때도 있다. 희망과 달리 절망은 밑바닥이 보이기 때문이다. 사랑이 꼭 결혼이나 함께사는 것으로 성취되는 건 아니지만, 사랑하면서도 헤어지고, 사랑하기 때문에 파멸조차 불사해야 한다는 건 억지이다. 세상에 사랑처럼 무정부주의인 게 있을까? 사랑처럼 피비린낸나는 식민지가 있을까? 사랑이 온유하고 평화로울 땐 규범 안에 있을 때뿐이다. 사랑이 그 규범을 뚫고 나오면, 아무도 감당할 수 없는 한 대의 불덩어리가 된다. 사랑하는 연인 중 한사람이 그 불덩어리를 삼키거나 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불은 모든 것을 태우고 하늘까지 치솟는다. 나는 내가 먼저 그 불꽃을 꺼버렸다. 사랑 대신 삶을 선택했다. 삶을 선택함으로써 사랑을 영원히 내 가슴에 묻어 놓았다. 나의 첫사랑. 몸과 마음이 함께 행복했고 함께 고통스러웠던 사랑. 문득 문득 그 사랑이 깨어나 나를 괴롭히긴 했지만, 이제 그 사랑 때문에 고통스럽진 않다. 그 사랑이 벽이 되어 나의 길을 가로막지도 않는다. 한없이 서로를 바라보고 또 바라보는 것, 그것이 우리 사랑의 한계이며 전부였지만, 그 사랑이 대해 어떤 회한도 갖고 있지 않다. 나는 내가 사랑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그를 사랑했다. 그도 그랬으리라 생각한다. 지나간 사랑이 아름다운 건 덧없이 어두운 이 세상을 빛에 비유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지나간 사랑을 들여다볼 때마다 그속에 아직 남아 있는 연인들의 희미한 박수소리, 사라져 버릴 나날들의 그 반짝거림 때문이 아닐까? 다시는 맛볼 수 없는 어제의 찬란했던 빛들의 아름다움에 대한 아쉬움 때문이 아닐까? 그토록 열렬히 그 사랑에 매달렸음에도, 나는 이제 그 사랑의 뒤쪽에 무엇이 남아 있는 지 돌아보지 않는다. 아무리 그가 불러도 뒤돌아보지 않는다. 그는 이제 나의 오빠일 뿐이다. 똑 같은 피를 가진 사람.
아직도 나는 여전히 그를 오빠라 부른다. 그러나 이제 그 부름속에 타는 불꽃은 없다. 여전히 그를 사랑하지만, 그 사랑 속에 담금질된 헛된 욕망이나 갈증은 없다. 그 모든 것들은 이제 어제가 되었다. 나는 어제를 뒤돌아보지 않는다. 어제의 빛이 아무리 오늘의 영양소가 된다 해도 나는 그 영양을 취하지 않는다. 나는 오늘에다 내 영혼을 묶었다. 어제의 내 사랑은 그의 건물이다. 나는 이제 휠휠 어디론가로 날아갈 것이다. 언젠가 먼먼 훗날, 그가 내 선물상자를 풀 게 될 때쯤이면, 아마도 나는 그 상자 속에 없을지도 모른다. 파랑새는 절대 돌아오지 않는 새이다.
- 김상미 1957년 부산에서 출생하여 1990' 작가세계' 여름호를 통해 등단했다. 시집으로 '모자는 인간을 만든다',' 검은, 소나기때'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