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작업실에 오셨다. 장남이 그림을 그린답시고 값싼 지하실을 전전하는 동안 한 번도 찾아오신 일이 없으셨던 아버지가 연락도 없이 오신 것이다. 밤 열한 시가 다 된 시간에 라면을 먹고 있던 나는 당황한 정도를 넘어 민망스러웠다. 아버지의 손에는 이홉들이 소주 한 병과 안주감이 들려 있었다.
"내가 술이 좀 취해서 차를 몰고 집에 들어가기가 힘들겠다. 오다가 요 앞 가게에서 파는족발이 하도 맛있게 생겼길래......너 족발 좋아하지?"
그날 밤 아버지와 나는 술잔을 주고받으며 그간에 쌓였던 보이지 않는 벽을 조금씩 허물어 갔다.
"나야 그림에 대해 뭘 알기나 하나. 그림 그리는 자식을 뒀다지만 나는 아직도 그림에는 영 문외한이다."
이렇게 말씀하시며 "참 좋다"를 연발하셨다. 그렇게 밤이 깊어갔고, 전작이 있으셨던 아버지는 자리에 눕자마자 코를 고셨다. 잠이 드신 아버지의 주름진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보니 괜히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다음날 지끈거리는 머리를 감싸쥐며 일어났을 때 아버지는 안계셨다. 그리고 벽에 걸려 있던 풍경화 한 점이 사라졌다. 대신 그 자리에는 노란 종이 위에 먹을 갈아 정성스렀게 쓴 아버지의 불글씨가 붙어 있었다.
「아버지가 그림 한 점 가져 간다. 이야기하고 가져 가야겠지만 곤히 자고 있어서 그냥 간다. 턱없이 모자라겠지만 그림 값은 탁자 위에 놓았다. 라면만 먹지 말고 밥을 먹도록 해라. 그리고 다음 주 토요일이 네 어머니 생일이니 선물 하나 준비해서 꼭 오너라.
-아버지가 장남에게」
나는 끝내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아들의 그림 한 점 맘놓고 가져가지 못하고, 생활에 보태 쓰라고 그림 값까지 두고 가신 아버지께 나는 과연 어떠한 아들이었던가. 다음 주에는 꼭 집에 가서 이렇게 말하리라. 아버지가 사 가신 그림을 보니 그림 보는 안목이 보통은 넘어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