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은 아들 둘에 딸이 둘이다. 할머니께서 내리 딸만 일곱을 낳고, 마지막으로 귀한 아들을 얻었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아들 손자에 대한 애착이 유별나신 분이셨다. 엄마는 오빠 둘을 낳은 후에 나를 낳았는데 첫째, 둘째가 아들이었으니 셋째도 당연히 아들일 거라는 근거없는 믿음을 가졌던 할머니께 나는 반갑지 않은 존재였다. "달고 나와야 할 고추는 어디다 떼어 버리고 나왔냐"며 내가 태어나고 두 시간이 지나도록 한쪽에 밀어두고 씻어 주지도 않으셨을 정도였으니까. 손자가 둘 씩이나 있었으면서도 뭐가 그리 서운하셨는지 할머니는 돌아가실 때 까지도 나를 보는 눈길이 곱지 않으셨다. 그래도 동생이 태어났을 때는 손녀일 거라고 미리 생각하셨던지 "달덩이처럼 곱구나"하시며 좋아하셨다. 어쨋든 할머니와 나 사이엔 '마가 끼었다'며 오빠들이 놀려대곤 했다. 출장은 자주 다니셨던 아버지가 집에 오실 때면 가방 속에는 항상 사탕 봉지가 가득 들어있었다. 그러면 할머니께서는 그 사탕을 받아서 큰오빠 열 개, 작은 오빠 일곱 개, 나와 동생에게는 다섯 개씩 나누어 주셨고 분배가 끝나고 남음 사탕은 다시 오빠들의 주머니 속에 몰래 넣어 주셨다. 언제나 똑같은 할머니의 사탕 분배는 내게 커다란 불만이 아닐 수 없었다.
내가 고등학교 이학년이 되던 해였다. 육개월 동안 병으로 누워 계시던 할머니께서는 돌아가시기 며칠 전에 엄마에게 여기저기 숨겨둔 당신의 비상금을 찾아오도록 했다. 그리고 우리를 모두 불러 놓고 꼬깃꼬깃 접힌 천 원짜리와 동전들을 모두 꺼내시며 말씀하셨다.
"할머니가 주는 마지막 선물이 될 거다."
그리고는 큰 오빠에게 천 오백원을, 작은 오빠에게는 천 원은, 나와 동생에게는 오백원씩 나누어 주셨다. 그것은 할머니에게서 받은 처음이자 마지막 용돈이었고 할머니의 마지막 분배였다. 그러나 그 다음날이었다. 오빠들과 동생이 없던 그날 오후에 할머니께서 나를 부르셨다.
"할머니가 아직 이백원이 더 있었네."
이불 밑에 숨겨 두었던 이백원을 내 손에 꼭 쥐어 주시는 것이었다. 큰손녀에게 살갑게 대해 주지 못했던 것이 마음에 걸리셨는지 어서 집어 넣으라고 고갯짓을 하시던 할머니, 그 모습이 아짓 눈에 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