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이 지던 그날, 할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하던 나는 얼마의 지폐가 든 하얀 동투를 발견하고 왈칵 눈물을 쏟았다. 부모님이 이혼하는 바람에 나와 동생은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생활했다. 할아버지가 국수를 뽇아 생계를 유지하지만 생활이 어려워 고등학교를 진학할 때는 돈도 벌 수 있는 산업체 야간학교를 택했다. 그러나 그 학교는 공장 근무를 일 년 이상 해야 하는 조건이 있었으므로 나는 중학교 삼학년 겨울방학 때부터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해가 바뀐 1월 10일, 첫 월급을 탄 나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며 할아버지 할머니 앞에 봉투를 자랑스럽게 내밀었다. 할머니는 대견하다며 연신 눈물을 찍어 내셨지만 할아버지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당연하다는 득 천원짜리 육십장을 천천히 세어 본 뒤 귀가 접힌 돈과 앞뒤가 뒤집힌 돈을 차례차례 귀를 펴고 맞춰서 툭툭 다독였다. 그 동작이 어찌나 느리던지 할아버지 앞에서 한달 용돈을 기다리던 나는 지루하고 답답하기만 했다. 할머니는 애가 고생하면서 번 돈이니 마음대로 쓰라셧지만 할아버지는 그런 할머니를 호되게 야단치시고 달랑 천 원짜리 세장을 내미셨다. 나는 속으로 '내돈인데.....'하며 뾰로통해졌다. 월급봉투를 서랍에 집어 넣는 할아버지가 너무나 야속해서 그날 밤 나는 그대로 회사 기숙사로 돌아와 버렸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매번 할아버지 앞에서 삼천원을 타기 위해 기다린 지루함이 먼 기억으로 남아 있는데 할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하다 책상 서랍 한쪽에서 가지런히 귀가 맞추어진 지폐 몇 장이 든 돈봉투와 스물일곱장의 월급봉투, 그리고 내 이름으로 된 저금통장을 발견한 것이었다. 한번도 '수고했다'는 말씀이 없으셨던 할아버지셨지만 월급봉투 한 장까지 하나도 버리지 않고 깨끗이 보관하신 것으로 보아 나를 얼마나 대견하게 생각하셨는지를 알 수 있었다. 내 이름 석자가 또렷이 박힌 월급봉투를 안고 나는 한참이나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