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시대고와 그 희생
우리 조선은 황량한 폐허의 조선이오, 우리 시대는 비통한 번민의 시대이다. 이 말은 우리 청년의 심장을 찌르는 듯한 아픈 소리다. 그러나 나는 이말을 아니할 수 없다. 엄연한 사실이기 때문에, 소름이 끼치는 무서운 소리나, 이것을 의심할 수 없고 부정할 수도 없다. 이 폐허 속에는 우리들의 내적(內的), 외적(外的), 심적(心的), 물적(物的)의 모든 부족, 결핍, 결함, 공허, 불평, 불만, 울분, 한숨, 걱정, 근심, 슬픔, 아픔, 눈물, 멸망과 사(死)의 제악(諸惡)이 쌓여 있다. 이 폐허 위에 설 때 암흑과 사망(死亡)은 그 흉악한 입을 크게 벌리고 곧 우리를 삼켜버릴 듯한 삼이 있다. <중간 4행 줄임> 이 세상은 고해(苦海)와 같다고 말한다. 사실에 가까운 것 같다. 흔히 우리 인류 생활의 전체를 지배하는 것은 고(苦)가 아닐까. 사실을 회피하여 은폐하고 부정함은 어리석다. 사실은 사실대로 그대로 승인하고 그것을 처리하며 그것을 초월치 않으면 안될 것이다. 약한 인간이나 민족은 그 고에 눌려서 그의 노예가 되고 그 고에 못견디여서 쇠멸(衰滅)하고 만다. 강한 자는 그 고와 싸우고 정복하여 쳐 이기고 퇴치코자 최후까지 백방으로 분투한다. 이에 불꽃이 튀고, 천지를 움직이는 대활동이 일어나고 처참한 대비극이 연출된다. 그리고 분투(奮鬪)의 정도를 따라 승리의 운명을 복(卜)한다. 강자의 승리는 과시(果是) 선전건투(善戰健鬪)에만 있다. 우리는 그 싸움속에 사는 가치와 의미를 발견한다. 소극적으로, 일체 곤란, 압박, 부자유, 부여의(不如意)의 고통과 싸워 이기고 적극적으로 일체 진, 선, 미와 자유, 모든 위대한 것, 신성한 것, 숭고한 것을 얻기 위하여 싸운다. 그 싸움이 얼마나 신성하며 이 싸움을 잘 싸우는 자 얼마나 영광이랴. '나는 허무와 싸우는 생명이다. 밤에 타는 불꽃이다. 나는 밤이 아니다. 영원한 싸움이다. 어떠한 영원한 운명이라도 이 싸움을 내려다 보지는 못한다. 나는 영원히 싸우는 자유 의지(意志)이다. 자, 나와 함께 싸우자. 타거라 부단히 싸우지 않으면 아니된다. 신도 부단(不斷)코 싸우고 있다. 신은 정복자이다. 비유하면 육(肉)을 탐식(貪食)하는 사자와 같다' 이는 근대 영웅 정신의 권화(權化)인 로망 로랑의 말이다.
우리는 인생이니 인생고가 있고, 인간이니 사회고(社會苦)가 있고, 시대에 처해 있으므로 시대고가 있다. 이 여라 고통 중 어느 것도 심각한 고통이 아니랴마는 그 중 우리 운명에 대하여 직접 영향을 미치고 가장 핍절(逼切)하고 가장 절박한 관계와 지배권을 가진 것은 시대고이다. 왜 그러냐 하면 우리는 시대의 아들인 동시에 특히 우리는 비상한 시대에 처해 있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시대고의 문제를 해결하면 기타의 문제는 비교적 쉽게 해결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 된다. 가장 중요한 선결 문제는 시대고이다. 오늘날과 같이 비상하고 혼돈한 시대에 있어서는 이 시대고의 문제가 한층 긴장하고 또 중대한 지위를 점령할 것이다. 그래서 우선 나는 급한대로 이 시대고와 그 희생과 그 뜻의 일단(一端)을 논하여 일종의 암시를 얻고자하며 겸하여 비상한 시대 특히 그 과도기에 처한 뜻있고 마음있는 우리 남녀 청년의 충정(衷情)의 고민을 조금이라도 위로할 수가 있기를 바란다<11행 줄임>.
우리의 시대는 말할 수 없는 오뇌를 가지고 있다. 그는 결코 생활난의 고생이나 허영심에 뜬 초조와 속적(俗的) 성공열(成功熱)에 따른 불만과는 비교를 불허하는 엄숙한 오뇌이다. 진자기(眞自己)도 희생함을 요구하여 가차(假借)치 않도록 잔인하고 필연적인 고민이다. 이 시대의 고민 오뇌는 가장 진실한 청년 남녀에게만 이해되고 체험되며 또 가장 처참하게 심각하게 오뇌된다. 이러한 청년은 실로 시대 요구에 제일 충실하고 무구(無垢)한 희생자이다. 오늘날 생각 있고 진실한 우리 청년들은 모두 다 이러한 상태에 있다.
단 이뿐이면 참을 수도 있겠다. 저들은 물론 이 시대 사람들의 동정이나 이해를 얻지 못한다. 왜 그런고 하니 이 시대들은 저들의 시대적 고뇌를 상상할 수도 없으니까 ! 저들은 자기에게 가장 가깝고 믿을만 하다는 사람에게 향하여 자기의 오뇌를 호소한다. 그는 반드시 남에게 동정을 얻으려 하는 박약하고 비천한 마음으로 나온 것이 아니요, 다만 자기의 하는 바를 아지 못하는 답답함에서 나오는 것이나 가엾은 그네들은 예상치 못한 무이해(無理解)와 냉담한 응답을 듣고 암흑한 고독의 심연을 볼 뿐이다. 그러나 정열적인 그네들은 그 전율(戰慄)할 고독의 적연(寂淵)에 뛰어들어가기를 피(避)치 아니한다. 그래서 자기 희생을 더욱 비극으로 한다. 가깝고 동정이 있을만한 자에게도 이해(理解)가 없거던 항차 기타(其他)에서랴. 세상과 그네들은 마주하되 마치 가시로 살을 찌르는 듯한 냉소와 모멸과 매리(罵리)로써 한다. 세상과 그네들과는 세대가 틀리고 세계가 전이(全異)하니 부득이한 현상이라 하더라도 격리(隔離)가 너무 심하다.
세인의 눈에는 생활난이나 성공난의 불공평이나 혹은 허영야심의 권화(權化)같은 무지몰각자(無知沒覺者)로 밖에 비치지 않는 것같다. 무슨 생각이 있고 열정이 있고 무엇을 진정 해 보고자 하며 참 의미있는 생활을 영위코자 하는 청년들은 다만 함부로 전통과 습속(習俗)과 권위에 반항하는 부도덕자(不道德者), 비애와 고립을 자초(自招)하는 우자(愚者), 자기와 세상을 보지 못하는 또 세간(世間)과 보조를 합해 갈 줄 모르는 유치자(幼稚者)라는 냉평(冷評)을 퍼붓는다. 또 조금하면 '어른'들의 우뢰같은 꾸지람이 비오듯 한다. 그뿐만 아니다. 밖에도 또 마적(魔賊)이 있다. 소위 설상(雪上)에 가상(加霜)이다. 저, 남들은 우리들의 생각, 말, 행동 태도를 멸시하고 더구나 우리들의 요구, 이상, 정신을 꺾고 밟는다. 우리들의 모든 것과 모든 일은 다 소용이 없단다. 모든 것을 다 해 줄터이니 너희들은 국으로 가만히 있으란다. 저희들에게는 우리의 입을 꼭 봉하고, 우리의 눈은 꼭 감고, 우리의 귀는 꼭 틀어막고 손과 발을 꼭 비쓸어매고 무형(無形)한 정신이나, 마음까지라도 꼭 비끌어매고 있었으면 좋을 듯이나 싶이......우리들도 하도 답답할 때에는 차라리 그렇게나 되어버리고 말았으면 하는 절망의 탄식, 암흑과 사(死)의 비통이 있다. 우리의 절대 제한과 부자유와 억울과 고민은 이에 있다. 우리의 희생은 더욱 비장(悲壯)해 간다. 이같이하여 시대를 오뇌하는 진지한 청년은 무저항속에 침(沈)하여 간다. 저들은 남에게 이해도 못 되고 또 이해할 수도 없는 절대 불가해(不可解) 속에 고독한 혼을 안고 간다. 세상은 더욱 속적(俗的)으로 추악하게 발전해가고 좀 새롭다는 자도 웬만큼 낡아지고 무지(無知)한 자는 방탕하고 간교해 진다. 다만 진실한 청년만 영원한 정적(靜寂)으로 흘러간다. 세상은 참 기묘하다.
그러나 시대의 애련(哀憐)한 희생은 과연 무의미한 것일까? 전혀 무가치한 것일까? 물론 현재에 있어서는 하등의 동정을 얻기 어렵다. 그러나 변해오는 새 시대에는 누가 능히 이 젊은 침묵의 비극에 대하여 따뜻한 회상의 꽃을 전져 일국(一국)의 눈물을 뿌려줄까? 어느 누가 능히 그 현실의 자유와 문화 속에 비통한 과거의 역사가 파묻혀 있는 것을 상상할까. 다만 신(神)과 같은 시인 뿐이, 이 '때'의 냉혹을 울것이 아닐까. 물론 이러한 희생은 어느 시대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시대처럼 가장 많이 가장 심각하고 냉담한 때는 드물었을 것이다. 오늘날 깊이 자각이 있고 진실한 우리 남녀 청년의 고뇌를 아는 나는 이같이 말한다. 아아 그러나 우리 청년은 약하게 지관해서는 안되겠다. 다만 감상적으로 실망해서는 안되겠다. 우리는 지금 시대의 오뇌를 체험하고 고민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 이상의 것 즉 영원한 생명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리고 그곳에 가장 자유와 정열이 충만한 생활의 영원미(永遠美)에 투철하려 원하는 고로 시대 속에 시대를 위하여 우리를 고뇌케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 일개(一個)의 의식 세계 속에 우리들을 고뇌케 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자기의 협애(狹隘)한 의식 세계중에 독거(獨居)하여, 거기서 모든 문제를 속히 해결하려고 해서는 안되겠다. 그곳에는 난감한 실망과 단념과, 적멸(寂滅) 이외에 다른 것은 찾아보지 못 할 것이다. 우리 청년은 영원한 생명을 잊어서는 안된다. 우리의 눈은 늘 무한한 무엇을 바라보아야 하겠다. 우리의 발은 항상 무한한 흐름 한가운데서 서 있어야 하겠다. 우리의 심정은 항상 영원한 사랑과 동경 속에 있어야 하겠다. 이러한 태도로 우리는 우리의 체력이 께속하기까지 의지력(意志力)이 열(熱)하기까지 진행치 않으면 안되겠다. 어떠한 오해나 핍박이 있을지라도 우리는 자유에 살고 진리에 죽고자 한다(3행 줄임).
우리는 항상 영원한 광대한 세계에 있어야 하겠다. 그리고 강한 신앙을 가지고 노력하고 분투해야 하겠다. 이 강한 신앙과 노력 속에만 우리의 의의(意義)와 가치를 구하지 않으면 아니되겠다. 일체 편견, 고루(固陋), 사념(邪念)을 파기하여야할 것이다. 우리는 시대의 희생이 되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구태여 남으로 하여금 피하게 할 것도 없다. 희생은 본래부터 비극이다. 그러나 영원한 내적 세계에서는 그것은 가장 숭고하고 장엄한 부활이다. 아무리 적은 희생이라도, 아무리 정일(靜溢)한 침묵에 파묻힌 희생일지라도 영생의 빛속에 들어오지 않을 것은 없다. 그는 우리의 시대를 뇌(惱)케하고 있는 영원한 생명의 세계에서는 여하한 존재라도 축복 아니되며 영생화(永生花)되지 않고 소멸하는 것은 절대로 없을 것이므로 이것이 우리 청년의 열정적 신앙이다.
우리의 생존하는 시대의 오뇌는 영원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는 탐욕적인 무수한 젊은 비극을 요구하나 그중에 하나라도 무의미(無意味)하게 망각리에 장사(葬事)될 것은 없을 것이다. 그러한 희생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그는 즉 영원에서 사는 고로. 이 시대의 오뇌는 언제까지든지 이대로 울굴(鬱屈)해 있을 것은 아니다. 그는 반드시 가까운 장래에 격렬한 변동을 일으키고 말 것이다. 그 변화는 폭풍우일는지 대홍수일는지 대진동일는지 또는 무엇일는지는 우리의 예언할 바 아니다. 그는 아무 것이라도 관계치 않다. 그러나 어떻든지 대변화가 올 것은 확실하다. 그는 영원한 활동을 자유로 분방적(奔放的)으로 현현(顯現)하려 하는 시대의 오뇌는 방금 그 고조(高潮)에 달해 있는 고로 그리고 생명은 최후의 승리와 개가로써 더욱더욱 돌진할 것이다. 아~ 이 시대의 대변동에 제(際)하여 어떤 일이 심판될까. 어떤 사람이 영원히 축복을 받으며 어떤 사람이 여원히 저주될까. 누가 가장 행복이며 누가 가장 화(禍)로 올까? 우주의 심판자가 진리와 비진리를 척결할제. 우리는 이러한 상상을 그만두자. 우리는 다만 용기를 가지고 나아갈 뿐이다. 최후까지 강한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 족하다. 영원한 생명과 축복은 그 가운데 있을 것이다. 그때 비로소 황량한 우리 폐허에는 다시 봄이 오고 어린 생명수(生命樹)에는 꽃이 피겠다. 그때 그곳의 주인은 누구일까? 이 험난한 시대에 처하여 어느 형식으로나 진정으로 가장 애많이 쓰고 눈물과 피로써 일체에 잘 싸워온 사람 특히 남 모르는 중 침묵리에 새로운 시대 창조를 위하여 가장 희생을 많이 한 그 사람들일 것이다.
<1920. 7. [폐허] (창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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