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대표수필 - 김동리 외 9명
"송건호 편"(1927~2001)
평론가. 충북 옥천 출생. 서울대 법대 졸업. 한국 일보, 경향신문, 조선일보, 동아일보의 논설위원과 경향신문. 동아일보의 편집국장을 역임. 저서에 "민족 지성의 탐구" "한국 민족주의의 탐구" 등이 있다. 역사적 안목의 비판이 실린 많은 평론. 에세이를 발표했으며 한국 지성의 현실과 문제를 일깨우는 인물로 지목되고 있다.
선비 정신
기사도, 무사도
선비 예찬론이 심심찮게 저널리즘의 화제가 되고 있다. 아다시피 선비는 이조 5백년간 양반들의 이상적 지식인상으로서 중세 유럽의 기사도나 일본의 무사도처럼 지난날의 이상상이지 지금 우리가 모범으로 삼을 인간상은 못 된다. 원래 이상적 인간상이란 나라나 시대마다 그 사회의 역사적 조건에 따라 다르며 선비가 우리 사회의 이상이 된 것은 그 때 양반 신분이라는 사회적 조건이 있었기 때문이고, 유럽에 기사도가 있고 일본의 무사도가 생긴 것도 제각기 중세의 봉건제가 그 체제를 유지하는 데 있어 필요로 한 인간상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대 시민 사회에서 이런 인간상이 필요 없게 된 것은 다시 말할 것도 없다. 한데 근래 '선비론'이 새삼스럽게 대두되고 심지어 예찬론마저 들리게 된 것은 그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인가. 한말로 '선비'는 이조의 신분 사회에서 지배층, 즉 양반들의 도의적 규범이라는 점을 들어야 하겠다. '선비'는 원한다고 아무나 모범으로 삼을 수 있는 인간상이 아니었다. 선비가 될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양반이라는 신분에 국한되었으며 상민은 아무리 인격과 학식을 겸비해도 선비가 될 수 없었다. 따라서 선비는 철저하게 비민중적이라는 점이 특징이다. 훌륭한 선비는 민중 앞에 초연해야 했으며 민중이란 '따르게 하고 알려서는 안 될 중우'에 지나지 않았다.
선비는 또 철저하게 비세속적이라는 점이 특징이다. '손에 돈을 쥐는 법이 없고 쌀값을 물어 보는 법이 없다'는 것이 선비 생활의 이상이라고 했다. 세속적인 문제는 일체 알려고도 않고 알지도 못하며 오로지 대의를 논하는 것이 선비의 마땅히 취해야 할 태도라고 했다. 선비의 생활은 한말로 관념적이라는 것이 특징이다. 18세기 말엽 이 땅을 찾아온 유럽의 선교사와 여행자들이 코리아의 양반 생활의 너무나 가난하면서도 빈궁 속에 태연한 태도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 사례가 많았다. 이런 형이 선비의 이상이라면 오늘의 우리에게 선비형 인간이 바람직한 사람이 못 된다는 것은 긴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한데 이처럼 전시대적 인간상인 선비가 오늘날 왜 새삼스럽게, 심지어 예찬까지 받게 되었는가. 4.19를 계기로 한때 구세대가 지탄의 대상이 된 적이 있었다. '구세대는 썩었다' '나라를 못쓰게 망쳐 놓았다'해서 마치 부정 부패의 상징처럼 공격의 대상이 된 적이 있었다. 사실 구세대는 이런 공격을 받을 만한 이유가 없지 않았다. 8.15 후의 정치, 경제 생활이 줄곧 상궤를 벗어나 혼란을 거듭한 것을 볼 때 비난의 적이 된 것도 무리라고만 할 수 없었다.
선비 대망론
그러나 지금 시대는 어떤가. 오히려 그 전 시대만도 못하다는 소리가 들린다. 일신의 출세와 안락을 찾아 변절을 해도 전처럼 수치는 고사하고 오히려 선망하는 풍조조차 생겼고, 부정 부패의 형태도 더욱 지능화되어, 도대체 도의적 처신의 기준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분간하기 어렵게 됐다는 평이다. '부조리 일소'란 구호 아래 당국의 정화 노력이 성과를 거두고 있다 하나 이른바 '윤리 도덕'의 타락은 상은 물론 사회 저변에까지 만연돼 일소 용이찮다는 말이 들린다. 국민 전체가 도의 의식이 타락됐다는 개탄의 소리가 들린다. '선비'의 예찬, 선비형 인간의 대망론이 대두하게 된 것도 아마 이 같은 시대적 배경에서 연유된 것이 아닌가 모르겠다.
선비란 위에서 말한 것처럼 전시대적 성격이 짙기는 했으나 한편 오늘의 시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한 미점이 없지도 않다. 비민중적이며 세속에 어둡고 공리 공론을 일삼는 관념적 인간이라고는 하지만 때로 그들은 지금의 사람들에게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용기를 대의를 위해 발휘하기도 했다. 직언을 하면 왕의 노여움을 사 목이 달아나는 것이 뻔한데도 죽음을 무릅쓰고 태연히 간언을 서슴지 않기도 했고, 나라가 위태로우면 관군이 무색하게 의병을 일으켜 외적과 싸우는 등 충의를 위해서 생명을 아끼지 않기도 했다.
옳은 일을 위해선 서거정의 말대로 '벼락이 떨어지고 목에 칼이 들어와도 서슴지 않는' 대쪽 같은 절개를 보이기도 했다. '사색당쟁'이란 비난을 받기도 했으나 옛 선비에 변절이란 도시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아들 손자대에까지 그들은 일편단심 변할 줄을 몰랐다. 매천같이 초야의 일개 무명 선비조차 망국을 보다못해 순국을 했다. 선비로서 의병 대장 또는 순국 열사로 길이 청사에 빛날 인물들은 얼마든지 있었다. 오늘날 선비 예찬론이 나오게 된 것은 그들의 그 굳은 지조, 순국의 애국 사상, 안빈 도락하는 생활 태도 때문이 아닐까 한다. 긍정적 면에서 선비의 좋은 점을 오늘의 시대에 되살려 보았으면 하는 생각에서일 것이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지금 우리에게는 '선비'의 전통이 거의 남은 것이 없다. 일본의 무사도, 유럽의 기사도는 근대에까지 무엇인가 전통을 남겼고 현대 사회에 긍정적으로 일부 계승된 족적이 남아 있으나 우리에게는 '선비'의 전통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여기에는 우리 나라의 특수한 역사적 조건이 작용했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한다.
우선 그들의 전근대적 성격을 지적치 않을 수 없다. 선비에게는 세속적인 면, 가령 경제 활동에 너무나도 무능했다. 경제 활동을 극도로 천시했으므로 더욱이 일제의 식민지 치하에서 살아 남을 능력이 없어 의를 지킨 '선비'일수록 경제적 낙오자가 되었다. 또 하나는 그들의 비민중성을 지적치 않을 수 없다. 식민지 치하의 우리 민족의 항일 투쟁엔 민중이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됐는데 '선비'는 그들의 생리로 보아 3.1운동 이후의 민중적 차원의 항일 운동에 참여할 수가 없었다. 김창숙 등 일부 유생에 대쪽같이 곧은 절개는 남아 있었으나 거의가 개인적 숭절에 불과했고 역사적 항일 조류에서는 사실상 소외되었다.
경계할 복고풍
그 자체 내에 이 같은 취약점이 있은데다 일제의 적극적인 회유 정책을 빼놓을 수 없다. 1910년 나라가 일제에 강제 병합당했을 때 그들은 특히 유림의 포섭에 주력했다. 즉 합방에 직접 간접으로 관여한 정부 요인들에게 작위를 주어 '은사공채'를 발행, 막대한 액수인 이자로 편안한 여생을 보장해 주었고, 이 밖에 정부 관리를 지낸 자 3천 5백 59명, 양반, 유생 9천 8백 11명에게 각각 후한 이른바 '은사금'을 뿌렸다. 구한국 정부의 관리란 으레 양반 유생 출신이며 과거 의병을 일으킨 '선비'들도 말하자면 유생이므로 그들은 특히 유생의 회유에 주력한 것이다. 이리하여 대부분의 유생은 일제에 포섭되고 나머지 수절한 유생들은 사회적으로 영락하고 게다가 항일 운동에서조차 소외되어 이조 5백 년간에 걸친 자랑스러운 선비의 전통은 이렇게 허무하게도 붕괴되고 말았다. 초야에 묻혀 살던 무명의 선비 황현이 스스로 자결의 길을 택한 것도, 5백 년간에 걸친 선비의 전통은 너무나도 무력하게 무너지고 나라는 망했는데 명색 선비란 사람들이 너나없이 일신의 안락을 위해 일제의 은사금을 타먹기에 급급하는 것을 보다못해 아편을 먹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다. 황현과 전후해 자결한 20여 명을 마지막으로 이조의 선비 정신은 사실상 전통이 끊어졌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오늘날 선비 예찬론이 대두된 것은 이미 사라진 이 같은 선비 정신을 그리워하는 심리라고 보겠는데, 이는 그만큼 오늘의 세대가 혼탁한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막연한 선비 예찬은 오늘의 시대에 긍정적 구실을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선비 예찬이 복고풍을 일으켜서는 안 되겠다. 선비란 중세 신분 사회의 양반층의 이상상이므로 선비 정신은 반민중적이 되기 쉽고 현실 의식의 결여, 생활 능력의 부정 등 어떻게 보면 현실에서 초연한 생활인을 그렇게 부르는 경향이 없지 않다.
선비를 이렇게 보고, 이런 뜻에서 선비 대망을 한다면 현대 사회에 있어 선비는 긍정적 구실을 하기 어려울 것이다. 현대가 요구하는 선비는 대중을 무시하는 고고형이 아니라 대중 속에서 같이 호흡하는 인간이 되어야 할 것이다. 오늘날의 선비는 공리 공론을 일삼는 관념형 인간이 아니라 현실 의식에 투철하고 그러면서도 현실에 매몰되지 않고 현실을 보다 높은 차원으로 지향하려는 이념형 인간이 되어야 할 것이다. 유럽 사회가 기사 정신을, 일본이 무사도를 근대 속에서 새롭게 그 정신을 계승했듯이 우리도 선비 정신을 오늘의 시민 사회 속에서 새롭게 되살리는 자각이 있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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