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어떻게 쓸까 - 이오덕
3부 국어공부, 무엇이 문제인가
논술시험, 무엇이 문제인가
무엇을 써야 하나? (1/2)
글쓰기에서는 무엇을 써야 하나? 하는 문제가 어떻게 써야 하나? 하는 문제보다 앞서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이 논술에서만은 무엇을 과 어떻게 의 차례를 바꾸었는데, 그 까닭은 학생들이 쓸거리를 마음대로 골라서 쓰는 자유가 아주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학생들이 어떤 문제로 글쓰기 공부를 해야 하는가 알아 보기 위해서 신문에 난 논술고사 예상(연습) 과제를 보기로 하자. 다음은 어느 신문에서 주마다 한 번씩 여러 대학의 교수님들이 내어 주고 있는 주제 들인데, 이 신문에서는 그 전주의 주제로 써 낸 글 가운데서 잘된 글을 최우수작 한 편, 우수작 세 편으로 뽑아 함께 싣고 있다. 몇 달 동안 나온 주제들을 보는 대로 적어 둔 것이 다음과 같다.
생명의 소중함을 논하라.
통일에 대비한 효율적인 국토활용 방안.
도덕성 타락의 원인데 대해 논하라.
건전한 사회는 건전한 가족을 기초로 하여 이루어질 수 있다 는 말에서 건전한 가족 의 핵심적 내용을 논하라.
바람직한 가족규범.
미래사회의 창의성에 대해 논하라.
낙태, 허용되어야 하는가.
우리 인간에게 자연이란 무엇인가.
세계화를 위해 우리는 무엇을 준비해야 하나.
외래어 상품명에 대한 종결부분 작성하기.
현대인과 점.
국가 발전과 민족문화 창달을 위한 새 가치관 정립에 대해 논하라.
지식의 습득과 교양적 자질과의 관계
1.바둑과 장기 2.학교와 학원 3.논개와 춘향 - 하나 택일, 비교 대조의 방법을 사용 설명하라.
진로 선택의 결정요인은 무엇이어야 하나.
외국어 조기교육의 장단점을 논하라.
국민학교 이름, 이대로 좋은가.
멀티미디어 시대와 독서
논술시험은 학생들의 사교력을 측정할 수 있는 도구가 될 수 있는가.
가정의 달 5월을 맞는 청소년의 다짐.
법의 양면성을 논하라.
내가 만약 시장이 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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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밖에 주제를 좀 긴 글로 써 놓은 것은 뒤로 미루고, 우선 여기 적어 놓은 과제들을 가지고 생각해 본다. 이 논술 문제들을 보면 거의 모두가 체험에서 나온 절실한 자기 의결은 쓰게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책에서 읽은 지식과 이론을 쓰도록 되어 있다. 바로이것이 논술시험 제도의 가장 큰 문제점이다. 이래서 이 논술시험 제도는 학생들에게 자기 삶에 대한 관심과 자기만이 갖는 감정과 생각과 의견을 갖지 못하게 하고, 무엇이든지 어른들이 주는 것만을 맏아들이도록 하는 허수아비를 만들고, 또 그러면서도 삶에서 동떨어진 빈 이론과 장난스런 말재주를 즐기는 괴상한 사람을 기르는 노릇을 잘 해내고 있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이 논술 주제들을 보면 아직 학생으로서는 관심을 둘 필요가 없거나 관심을 가지기에는 아주 이른, 다만 어른들이나 애써 생각해야 할 문제가 많다. 이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학생들을 너무 빨리 어른으로 만드는 교육이 된다고 할 밖에 없다.
논술 문제는 학생들이 누구든지 자기 체험을 바탕으로 하여 쉽게 자기 의견을 쓰면서 한편 좋은 생각을 하게도 되는 문제가 바람지간데, 그런 문제는 아주 썩 드물다. 다만,
생명의 소중함을 논하라.
우리 인간에게 자연이란 무엇인가.
도덕성 타락의 원인에 대해 논하라.
이런 문제는 체험을 바탕으로 하여 누구나 쓸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논하라 란 말을 꼭 써야 할까? 이런 말을 쓰니까 학생들이 쓰는 글이 그만 딱딱한 글말로 굳어지게 된다. 나 같으면 목숨이 왜 소중한가 말해 써 보시오. 우리 사회에서 도덕이 어째서 타락하였는지, 그 까닭을 써 보시오. 이렇게 쓰겠고, 인간 이란 말조차 사람 으로 써서, 이렇게 하겠다. 우리 사람에게 자연이란 무엇인가. (이것은 차라리 자연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 자기 생각을 써 보시오 라고 하는 것이 좋겠지만) 앞에서, 신문에 내어 놓은 논술 문제로 글을 쓰면 책에서 읽은 것이나 교실에서 배운 것만 쓰게 된다고 했는데, 실제로 학생들이 쓴 글을 보기로 하자. 국민학교 이름, 이대로 좋은가 란 제목이 있었다. 요즘 이 문제가 온 국민의 관심거리로 되어 있어서 논술 문제로서는 매우 알맞아 보인다. 그러나 국민학교란 이름이 왜 생겨났는지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아주 드물다. 일제시대를 살았던 사람도 그 당싱의 법령을 잘 아는 사람이 아니고는 모른다. 그러니 아무리 온 국민의 관심거리가 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결국 남다른 생각으로 애써 여러 가지 자료를 조사해 본 사람이 아니고는 그저 사람들이 퍼뜨리는 소문 같은 것이나, 신문에 슬쩍 스쳐 지나는 정도의 기사로 짐작하는 것이 고작일 것이다. 학생들 역시 특별한 뜻이 있어 이 문제를 올바르게 가르쳐 주는 선생님들 만날 수 있어야 되겠는데, 제대로 정확하게 말해 줄 수 있는 교육자가 우리 나라에 몇이나 될까? 그러니까 매우 적절해 보이는 논술 제목같지만 사실은 제대로 쓰기가 매우 어려운 제목이다. 이 논제로 써 낸 작품이 최우수작 한 편에 우수작 세편으로 모두 네 편이 신문에 발표되었는데, 그 내용을 읽어 보니 모두 어슷비슷하다. 그리고 국민학교란 이름을 그대로 써서는 안되는 가장 큰 까닭을 올바르게 쓴 사람은 아무도 없고, 또 모두가 잘못된 말을 써 놓았다. 국민학교란 이름은 왜정 마지막에 포악한 왜놈들이 우리 아이들에게 군대교육을 시켜 전쟁터에 끌고 갈 준비를 하기 위해 붙인 이름인데, 그것이 그 때 나온 법령에 환히 나타나 있다. 이 사실을 학생들이 알아야 하는데, 아무도 쓴 사람이 없다. 그러면서 국민이란 말은 일본 국왕의 신민이란 뜻이다 고 모두가 잘못 써 놓았다. 국민이란 말이 일본국왕의 신민을 가리키는 말이라면 미국 국민 영국국민 프랑스 국민 이라고 쓸 수는 없다. 국민이란 말이 백성보다 더 좋은 말은 아니지만 쓰지말아야 할 말은 아니다. 또 국민이란 말을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처음 쓴 말도 아니다. 그런데 국민학교 란 말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왜놈들이 흉악한 속셈으로 소학교란 이름을 그렇게 바꾼 것이니 그냥 두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학생들에게 국민학교 이름, 이대로 좋은가 란 제목으로 글을 쓰게 한다면 미리 국민학교란 이름이 언제 어떻게 해서 생겼는가를 정확하게 가르쳐 놓아야 할 것이고, 국민학교로 이름이 바뀐 뒤로 일본 식민지 교육의 실상이 어떻게 되어 있었던가를 자세하게 알려 주어야 할 것이다. 그런 교육은 하지도 않고 글만 써 내라고 했으니 내용이 비어 있고, 또 잘못된 생각을 다만 어른들이 흔히 쓰는 어설픈 글말로 모두 어슷비슷하게 쓸 수밖에 없다. 미리 교육을 잘 해 놓았다고 하더라도 결국 머리 속에 들어 있는 지식을 쓰는 정도밖에 안 되지만, 그런 지도조차 없이 썼으니 무슨 글이 되겠는가? 다른 논제로 쓴 학생들의 글도 흔히 이런 꼴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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