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도편" 이영도(1916~1976)
여류 시인. 경북 청도 출생. 경남에서 오랫동안 여학교 교사 생활을 했음. 시조를 주로 썼으며 수필에도 많은 작품을 남겼음. 이영도의 시조들에는 민족 정서를 바탕으로 잊혀져 가는 고유의 가락을 재구현하려는 노력이 담겨 있다. 간절한 표현으로 자신의 정감을 다스리며 인생을 관조하는 세계를 보여 주었다.
모색
지극히 그리운 이를 생각할 때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돌듯, 나는 모색 앞에 설 때마다 그러한 감정에 젖어들게 된다. 사람의 마음이 가장 순수해질 때는 아마도 모색과 같은 심색일는지 모른다. 은은히 울려 오는 종 소리 같은 빛, 모색은 참회의 표정이요, 기도의 자세다. 하루 동안을 겪어 낸 번잡한 과정 다음에 밀려드는 영육의 피로와 허황한 감회는 마치 한낮의 강렬했던 연소의 여운이 먼 멧등에 서리듯 외로움이 감겨 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저 유명한 화가 밀레도 한 가족의 경건한 기도의 모습을 모색 앞에 세우고 그림의 제목을 만종이라 붙였는지도 모른다.
황혼이 기울 무렵, 산그림자 내리는 들녘에 서면 슬프디 슬픈 보랏빛 향수에 싸여 신의 음성은 사랑하라고만 들려 오고, 원수 같은 것 미움 같은 것에 멍든 자국마저 밀물에 모래알 가셔지듯 곱기 씻겨 가는 빛깔... 어쩌면 내 인생의 고달픈 종언도 이같이 고울 수 있을 것만 같아진다. 가끔 나는 해질 무렵에 경복궁 뒷담을 끼고 효자동 종점까지 혼자 거닐 때가 있다. 이 거리에 석양이 내릴 때 가로수에 서리는 빛깔을 보기 위해서다. 봄 여름은 너울거리는 푸르름이 마음을 축여 주어 조용한 생기를 얻을 수 있지만 만추에서 초봄까지의 낙목일 경우엔 말할 수 없는 눈물겨운 빛이 된다. 가물가물 일직선으로 열지은 나목들이 암회색 높은 궁창을 배경하고 보랏빛으로 물들어 가는 하늘에 비춰 선 정취는 바로 그윽히 여울져 내리는 거문고의 음률이다. 이 음색에 취하여 혼자 걷노라면 내 마음은 고운 고독에 법열이 느껴지고 어쩌면 이 길이 서역 만리, 그보다 더 먼 영겁과 통한 것 같은 아득함에 젖어진다.
그 무수히 소용돌던 역사의 핏자국도 젊은 포효도 창연히 연륜 위에 감기는 애상일 뿐, 그 날에 절박하던 목숨의 상채기마저 사위어져 가는 낙조처럼 아물어 드는 손길! 모색은 진정 나의 영혼에 슬픔과 정화를 주고 그리움과 사랑을 배게 하고 겸허를 가르치고, 철학과 종교와 체념과 또 내일에의 새로움과 아름다움과...일체의 뜻과 말씀을 있게 하는 가멸음의 빛이 아닐 수 없다. 모색 앞에 서면 나는 언제나 그윽한 거문고의 음률 같은 애상에 마음은 우울을 씻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