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어떻게 쓸까 - 이오덕
1부 산문을 어떻게 쓸까
소설쓰기 - 소설을 어떻게 쓸까
글재주를 부리지 말고
고등학생들은 어떤 형태(종류)의 글을 써야 할까? 이 물음에 대한 답은 두가지로 나올수 있다. 그중 하나는 국민학교 때의 글쓰기를 그대로 연장, 발전시켜서 글의 갈래를 좀더 자세하게 나누어 서사문, 사생문, 기사문, 감상문, 기행문, 설명문, 광고문, 논설문, 조사보고문, 편지글, 일기글, 시, 극본.. 따위로 쓰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문학작품의 갈래를 따라 시, 소설, 수필, 희곡, 평론을 쓰는 것이다. 이 둘 중 어느것이 옳은가? 교육과정과 교과서에서는 어떤 글을 쓰게 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실제로 써놓은 학생들의 글 - 어쩌다가 신문이나 잡지에 나오는 학생들의 글을 보면 위에서 말한 두 가지 대답 중 두 번째인 문학작품을 쓰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어제 오늘 이렇게 된 것이 아니고 벌써 수십 년 전부터 이어 온, 어른들 글 흉내내는 중고등학생들의 글쓰기 전통이다. 최근 어느 문화재단에서 청소년 문예작품을 현상으로 공모하면서 작품의 갈래를 시와 소설로 현상해 놓았고, 또 전국규모의 어느 문학단체에서도 청소년을 상대로 시와 소설을 현상모집하는 광고문을 낸 것을 보아도 30년 전이나 40년 전이나 학생들의 글쓰기 틀이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전체로 보면 중학교든 고등학교든 교과 공부에서 글쓰기란 것이 가장 천대받는 공부로 되어 있어서 거의 내버려둔 상태라 하겠다. 여기에다가 얼마 전부터는 이 글 첫머리에서 말한 두 가지 대답 중 첫째 대답에 나오는 여러 가지 글의 갈래에서 유독 논리만을 강조하는 논설문 쓰기가 점수따기 공부의 수단으로 별난 관심거리가 되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 논리로 쓴 글이 학생들이 자기를 표현한 글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기에 여기서는 다시 언급하지 않는다. 아무튼 학생들이 쓰고 있는 문예작품이란 것이 어떤 글인가를 살펴보기로 한다. 다음에 드는 글은 어느 여고 1학년 학생이 쓴 콩트 인데 어느 학생신문에 발표되었던 것이다. 콩트 는 단편소설보다 더 짧은 소설이다.
그 녀석
며칠전부터 나를 따라 다니며 지겹게 주위를 빙빙 돌던 그 녀석 때문에 나는 무척이나 신경이 쓰이고 피곤했다. 우리 동네 녀석이 분명한데 날 점찍어 놨는지 자꾸 내 주위로 접근하려는 것이 아닌가! 우리 집 식구들은 무척이나 더위를 타서 여름만 되면 집안의 모든 문을 열어 놓고 살다시피 한다. 그 바람에 녀석은 열려진 문 틈으로 힐끔힐끔 대문안을 훔쳐보더니만 이젠 아예 본격적으로 나를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내가 어떤 말이나 욕설을 퍼붓고 괴상한 행동을 해도 그 녀석을 잘 참고 견디어 냈으며 아무 상관도 없다는 듯이 계속 따라 다녔다. 그 녀석은 외모가 늘씬했고 눈매는 날카로왔으며 행동도 매우 민첩했다. 길고 쭉 뻗은 다리로 담벼락에 기댈 때에는 그의 매력이 한층 더 살아났다. 지구 끝까지라도 따라 다닐 심산인 듯, 나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그 인내심 또한 대단했다. 그날도 무척 무더운 하루였다. 일찍 잠자리에 들면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시 한번 문단속을 했다. 너무도 무서운 집념으로 달려드는 녀석이기에 마음만 먹으면 내 방까지 들어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 그것은 신경쇠약 내지는 과대망상일런지도 모르지만 그만큼 녀석에게 나는 지쳐 있었고, 아니 오히려 두려움마저 느끼고 있었으니까. 꿈나라 열차를 타려고 막 표를 끊는 순간 내 귀에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그 녀석일거라는 짐작과 함께 허겁지겁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 떨리는 손으로 불을 켜는 순간, 그 녀석과 창문이 내 눈에 들어오는 것이었다. 혹시나 가 역시나 였다 대단한 녀석이었다. 이 밀폐된 공간으로 침입할 수 있었다니... 내가 놀라는 바람에 그 녀석은 얼른 저만치 물러나 책상앞에 늘씬한 다리로 걸터앉았다. 나는 그 쭉 뻗은 다리에 조금은 호기심도 생겼지만 냉정하고 침착하게 행동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함이라도 지르면 녀석이 자기 신변에 위험을 느끼고 덤벼들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 녀석은 내가 고함을 치지 않는 것에 대해 저으기 안심하는 눈치였다. 난 머리를 급속도로 회전시켰다. 이제까지 나를 그토록 따라다녔고 이렇게 내 방까지 들어왔으니 결코 쉽게 물러나지는 않을 것이다. 짧은 시간에 이리 저리 궁리를 하는 사이, 그 녀석이 나를 어떻게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까지에 이르렀다. 등골이 오싹했다. 과연 그 녀석은 맛있는 고기를 눈앞에 둔 맹수처럼 슬금슬금 다가왔다. 큰일이다. 워낙 민첩한 놈이라 내가 당해낼 재간이 없을 것 같다. 나는 방을 둘러보며 무기를 찾았다. 그러나 내 방에는 신변을 보호할 무기가 될 만한 물건이 없었다. 놈이 다가옴에 따라 나도 재빨리 일어서서 한쪽 구석으로 갔다. 그런데 역시 그 녀석은 상당히 민첩했다. 그야말로 순간이었다. 그 녀석이 휙 나에게 달려드는 것이 아닌가. 순간, 가장 두껍고 무거운 국어대사전이 눈에 띄었다. 나는 혼비백산하여 재빨리 대사전을 꺼내 그 녀석의 머리를 힘껏 내리쳤다. 피가 튀었다. 그 녀석을 죽인 것이다. 그러나 살인했다는 두려움은커녕 오히려 통쾌감을 느꼈다. 나는 시체를 치울 생각도 하지 않고 그 지긋지긋한 놈을 죽였다는 사실을 아무에게나 알리고 싶었다. 그래서 힘껏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 엄마! 나 모기 잡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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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모기 이야기고 모기를 잡은 이야기다. 그런데 처음부터 마지막 한 줄 앞까지 읽는 동안에 아무도 이 이야기가 모기에 대해서 썼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할 것 같다. 이게 무슨 이야기인가? 아무래도 이상한데? 꿈을 꾼 이야기인가? 이제 곧 무슨 말인가 알게 되겠지. 이렇게 생각하면서 마지막까지 읽게 되는데, 결국 마지막에 나오는 말 한 마디에서, 자기를 따라다니면서 언제나 가까이 하려 하고 그래서 나중에는 서로 맞서 노려본 끝에 그만 죽여 버린 상대가 모기였다는것을 알게 된다. 이런! 모기 이야기였구나, 하고 그 뜻밖의 결과에 놀라는 다음 순간은 웃음이 나오고 어이가 없다는 느낌도 따른다. 이것은 어찌 보면 소설이라는 이야기를 만든 기술로서는 성공했다고 할 수도 있다. 어쨌든 읽는 사람을 마지막까지 끌어갔고, 그 마지막 판에서 관심을 더욱 모아서는 깜짝 놀라게 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 글을 읽은 다음에 우리 가슴에 남아 있는 것이 무엇인가? 모기에 시달리는 한 사람의 모습인가? 모기란 곤충의 지독스러움인가? 그 어는 것도 아니다. 다만 뜻밖의 일에 머리를 한 대 맞았다는 느낌뿐이다. 이 글을 읽고나서 어이가 없어 입을 벌리고 있는 독자 앞에서 글을 쓴 사람은 좋아라 웃는다. 그것 봐. 내 글재주가 어때? 용용 속았지? 하고. 과연 이런 것이 소설일까? 그러나 뜻밖의 일에 놀라게 하는 것이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드는 온갖 기술 가운데 하나가 될 수는 있어도 그것만 가지고는 소설이 될 수 없다. 이 글은 마지막에 가서 뜻밖의 일에 놀랐다는 것 밖에는 읽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 거의 없다. 그렇다면 이 글을 끝가지 읽게 되는 까닭은 무엇인가? 솔직하게 말해서 나는 좀 참고 읽었다. 무슨 말인지 무슨 이야기인지 알 수 없으니 참고 읽을 수 밖에 없다. 학생이 쓴 소설이니까 하고, 읽어 가면 뭔가 알 수 있겠지 하고 말이다. 그런데 좀더 순진한 학생이라면 아마도 이런 글을 끝까지 읽지는 않을 것 같다. 대체 무엇을 썼는지도 알 수 없는 글을 무슨 까닭으로 자꾸 읽어야 하는가? 그러니까 마지막에 가서 모기 이야기란 것이 밝혀지고, 그래서 지금까지 읽은 글을 헛 읽었다고 깨달은 것은 속았구나! 하는 깨달음인 것이다. 글쓴이가 읽은 사람 앞에서 웃는 얼굴로 나타나는 것은 잘도 속아 넘어 갔지 하는 웃음이다.
본래 소설이란 것이 독자를 감쪽같이 속이는 글쓰기 기술이라고 한다면 여기서 더 할말이 없다. 그러나 소설이 사람을 속이는 글이 되어서 되겠는가? 소설은 어디까지나 참을, 진실을 이야기하는 글이어야 한다. 이 그 녀석 이란 글은 모기 이야기를 쓴 것이니까 모기 이야기가 되어야 한다. 모기란 말이 없고, 그래서 읽는 사람들이 모기란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게 하고 그녀석 을 아주 사람같이 여기게 하는 것은 좋다. 다만 이럴 때 그 녀석 을 도무지 모기로는 볼 수 없는 말로 많이 적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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