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디는 비폭력 정신을 소중히 여겼다. 그와 마찬가지로 그는 침묵을 사랑했다. 위대한 성인이 그 침묵을 사랑하듯 나도 이 침묵을 사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그 침묵의 아름다움을 인식시켜 나갔다. 실제로 침묵은 아름다웠다. 악을 용납하는 침묵으로서가 아니라 더러워서 피하는 침묵이기 때문이다. 침묵은 곧 홀로 생각하는 시간을 의미하기도 했다. 침묵은 비굴이 아니라 무던히 참아내는 인내였다. 침묵은 교만이 아니라겸손이었다. 침묵은 미움이 아니라 사랑까지 하는 모습이었다. 나에게 이 침묵은 너무나 절절히 요구된다. 이 죄인은 이제 그만 교만과 미움을 버려야 할 때이기 때문이다. 이 죄인에겐 홀로 생각해야 할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침묵은 비폭력보다 앞서 요구되는 과제가 되었다.
이 글은 첫머리에 시작한 짧은 글월들의 맺음을 -리라 고 해 놓은 것이 무엇보다도 먼저 눈에 띈다. 그리고, 무슨 말을 잘못한 듯 입술이 죄라면서 간디의 말을 들어서 침묵을사랑한다고 했고, 그래서 침묵을 찬양하고 있는 말들이 매우 그럴듯하게 읽힌다. 주님이 정죄하신 입술 이 죄인은 이 죄인에게 따위 말들이 나오는 것은 기독교를 믿는 마음에서 하는 말이겠다. 그런데, 어째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되고 이런 글을 쓰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 아마도 무슨 말을 잘못한 일이 있었던가 싶은데, 그렇다면 그런일의 경과를 먼저 적어 두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 거기서 우러난 생각을 남들이 참 그렇겠구나 하고 함께 느끼게 될 것이다. 사람이란 말을 함부로 할 것이 아니구나, 말을 안 하는 것이 이롭고 말이 없는 상태가 아름다운 것이구나 하고 진심으로 느끼게 될 것이다. 일기는 남에게 보이기 위해 쓰는 것이 아니라고 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렇게 책으로 나왔다. 또 가령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 쓰는 글이 아니고 자기만 보고 마는 글이라고 하더라도, 이와 같이 마음의 움직임만을 적기보다는 사실과 체험을 적어 두는 것이 훨씬 더 필요하고 뒷날에 참고도 된다. 느낌과 생각이 삶에서 나온 것이니까 그 삶의 체험을 기록해 놓지 않고는 느낌과 생각이 살아날 수 없다. 또 삶의 체험을 적어 놓으면 느낌과 생각이 저절로 그 속에 나타나게도 되는 것이다. 이래서 이 침묵 이라는 글은 그만 책에서 읽은 간디의 말을 예찬하는 글처럼 된 것이 아닌가 싶다. 침묵은 유익하다, 침묵은 아름답다는 말들은 아주 그럴듯하다. 그러나 거듭 말하지만 이런 말들이 현실을 떠나 생각만으로 펼쳐지는 말이 될 때 문제가 생긴다. 실제로 침묵은 아름다웠다. 악을 용납하는 침묵으로서가 아니라 더러워서 피하는 침묵이기 때문이다. 악이 우리 앞에 있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 마땅히 그 악을 바로 잡으려고 해야 할 것이고 악과 싸워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해야 우리의 행동은 빛나고 아름다워진다. 그런데 그 악이 더럽다고 피하는 침묵이 아름답다니, 이게 무슨 말인가/ 악을 피해 침묵하는 것은 제 몸만 사리는 이기심에서 나온 몸가짐이요, 비겁한 것이다. 둘레의 형편에 따라서는 침묵을 반드시 비겁하다고까지 말할 수는 없을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남부끄럽고 괴로워해야 할 일이 되었으면 되었지 아름다운 행위로는 도무지 볼 수 없는 것이다.
어째서 이런 말을 하게 되었을까? 행동이 없고, 있어도 보잘 것이 없는 정도로 되어 있고 다만 책만 읽고 글만 쓰기 때문이다. 그래서 책으로 읽은 지식과 관념을 제것처럼 여겨서, 보잘 것 없는 제것과 마구 뒤섞어 놓기 때문이다. 이것은 글만 쓰는 문학인들이 흔히 빠지게 되는 말재주의 결과라고 할 것인데, 슬기로운 소년 현복이도 벌써 이런 길을 접어든 것이 아닌가 싶다. 끝으로 낱말 두어 가지를 지적한다. 의미하기도 이 말은 뜻하기도 라 쓰는 것이 좋겠다. 절절히 이 말은 간절히 나 절실히 로 써야 한다. 같은 한자말이면, 널리 써서 모두가 잘 알고 있는 말을 쓰는 것이 좋다. 이 밖에 간디의 말을 따와서 침묵의 유익함은 체험을 통해서만 안다 고 한 것은, 어느 책에 나온 것이겠지만 침묵이 유익함은 체험으로만 안다 고 하든지, 말없음이 이롭다는 것은 몸소 겪어야만 안다 고 써야 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