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어떻게 쓸까 - 이오덕
1부 산문을 어떻게 쓸까
일기글 쓰기 - 일기글 어떻게 쓸까 (1/4)
책으로만 익힌 말을 쓰지 말고
다음은 여중 3학년 학생이 쓴 어느 날의 일기다. 이 글 가운데 잘못 쓴 낱말이 있는지 없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진성여중 3학년 김하연
모의 고사 시험 보는 날이다. 난 어제 아파서 공부를 하지 못했다. 성적이 떨어질까봐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학교에 왔다. 나는 어제 큰 일을 치른 사람처럼 정신이 하나도 없고 맥이 없었다. 시험 보기 3분전, 나는 필통 속에 있는 컴퓨터용 연필을 깎으려고 꺼냈다. 내가 아무리 연필을 깎아도 심이 자꾸자꾸 끊어진다. 나는 가슴이 어두근거렸다. 시험 볼 시간은 2분도 채 안 남았는데. 앞에 있는 선아에게 연필을 깎아 달라고 부탁했다. 선아 역시 연필심이 자꾸 끊어진다고 한다. 내가 선아에게 계속 깎아봐, 선아야! 하고 말했다. 조금 있다가 선아는 미안하다는 듯이 연필을 보여주었다. 연필은 몽당연필이 되었고, 심은 끊어진 것 같았다.나는 괜찮아 하면서도 속으로는 마음이 두근거렸다. 종이 울렸다. 나는 컴퓨터용 연필이 없어 울똥말똥한 눈이 되었다. 나도 모르게 울음이 나오려 했다. 아직 선생님은 들어오시지 않았다. 그때 내 앞에서 하연아, 너가 내 연필 써. 나는 샤프연필로도 쓸 수 있으니까. 선아의 말이다. 아까 선아가 연필을 몽당연필로 만들어서 죄책감에 빌려주는 것보다 친구의 우정으로 빌려주는 것 같았다. 나는 눈물이 핑 돌았다. 나는 선아에게 잘 대해주지 못했는데, 그리고 샤프연필로 잘못하면 틀린 채점이 나오는데, 나에게 연필을 주고 자기는 샤프연필로 쓰다니! 고민이 많고 혼자라고 생각하는 나는 혼자가 아니라는 것 느꼈다. 내 주위에도 나를 생각해주는 친구가 있구나!
- (학급문집 <추억을 되새길 땐 이 책장을 넘기셔요>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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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잘못 쓴 말이 있는지 없는지 살펴보자 고 했지만, 이 글을 읽은 사람은 누구나 이 글에 나오는 선아란 학생의 고운 마음에 감동했을 것이다. 시험점수를 서로 많이 따려고 하고, 점수를 올리기 위해서는 조금이라도 손해 보는 짓을 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어 있는 학생사회에서 이렇게 따스한 정을 나누면서 사람답게 살아가는 학생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반갑고 기쁜 일인가? 정말 캄캄한 밤중에 등불을 켜고 둘레를 밝혀주는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길을 못 찾고 헤매면서 고민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밝은 불빛이 있음을 알려준 이 학생도 참 좋은 글을 썼다고 칭찬하고 싶다.
그러면 이제부터 이 글에 적힌 말의 문제를 이야기하기로 한다. 이 글은 어느 날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쓰면서 느끼고 생각한 것도 적었다. 어른들이 흔히 글에서만 쓰는 어려운 말이나 일본말법이 한 군데도 없고, 보통 입으로 하는 자기의 말을 그대로 썼다. 글을 쓰는 태도가 아주 제대로 되어 있는 학생의 글이라 하겠다. 더러, 좀더 정확한 말을 썼으면 싶은 데가 몇 군데 있지만 그런 것이야 대수롭지 않다고 본다. 그런데 단 한가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말이 있다. 그것은 연필심이 끊어진다 고 한 말인데, 세 군데 나온다.
- 내가 아무리 연필을 깎아도 심이 자꾸자꾸 끊어진다.
- 선아 역시 연필심이 자꾸 끊어진다고 한다.
- 심은 끊어진 것 같았다.
이 학생은 연필심이 끊어진다 고만 썼는데, 이렇게 써도 괜찮은가? 맞는 말일까? 만약 국어 시험에 다음과 같은 문제가 나온다면 여러분들은 어느 말에다가 맞는 말이라고 표를 해야 할까?
연필을 깎는데 심이 / 꺾어졌다.( )
/ 끊어졌다.( )
/ 부러졌다.( )
/ 떨어졌다.( )
연필심은 끊어졌다 고 하지 않는다. 꺾어졌다 고도 하지 않고 떨어졌다 고도 말하지 않는다. 연필심은 부러졌다 고 해야 한다. 왜 그런가? 우리말이 본래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부러졌다 고 해야 하는 까닭을 여기서 이치로 따져서 다른 세 가지 말이 주는 느낌과 말뜻의 다름과 함께 한참 설명말수도 있지만, 원체 이런 말에 대한 느낌이나 말뜻의 자세한 차이를 생활 속에서 제대로 느껴서 알고 있지 못한 사람이라면, 그런 사람에게 이런 느낌과 이치를 설명하는 짓이 다 소용이 없는 것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이 역시 생활이다. 어떤 말이든지 생활 속에서 익혀야 비로소 제것이 되는 것이다.
앞에서 보기로 든 글을 쓴 학생이 연필심이 부러진다 고 하는 아주 쉽고 평범한 우리말, 국민하교 1학년이면 저절로 다 익히게 되어야 할 말을 제대로 쓰지 못하고 엉뚱한 말을 쓴 까닭은 결국 어려서부터 연필을 칼로 깎는 생활이 없었고, 그래서 생활에서 쓰게 되는 살아 있는 말을 익힐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 학생뿐 아니라 이 학생과 같이 공부하는 오늘날 우리나라 학생의 문제다. 부러진다 는 말을 모르는 학생이 어째서 끊어진다 한 말은 썼는가? 끊어진다 는 말을 쓰게 된 까닭으로 우선 생각할 수 잇는 것은, 교과서나 그밖에 학생들이 보는 책에서 부러진다 는 좀처럼 나오지 않지만 끊어진다 는 가끔 나오기 때문이다. 책으로만 익히는 말의 허방 - 함정이 여기에 있다.
바로 며칠 전 몇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이 연필심이 끊어진다 는 글을 읽어주고, 학생들이 어째서 이런 말을 쓸까요 하고 물어 보았더니, 듣고 있던 한 분이 이렇게 대답했다. 그건 요즘 학생들이 끊는다 는 말을 많이 쓰기 때문이 아닐까요. 학원을 다니다가 그만두면 끊는다고 해요. 너, 요새 주산학원 끊었니? 난 피아노끊었어 이렇게 말하지요. 텔레비전에서도 끊는다는 말을 자주 써요. 이렇게 되면 이것은 한갖 유행하는 말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런데, 삶을 잃은 학생들의 입에서 유행하는 말은 결국 책과 방송에서 얻은 것밖에 될 수 없다.
이 끊는다 는 말에서 또 하나 생각나는 것이 있다. 얼마 전 동시를 쓰는 어느 학교 선생님이 시를 쓴 것을 보여 주었는데, 그 시에 고사리 끊으러 간다 는 말이 있기에 고사리는 꺾는다고 해야지, 왜 이렇게 썼어요? 했더니, 저도 고사리는 꺾는다고 알고 있었는데, 6학년 음악 교과서에 고사리 끊자 로 나와 있어요 했다. 교과서에 고사리 끊자 고 나와 있다니 세상에 무슨 그런 교과서가 있나 싶었지만, 교과서고 사전이고 잘못된 것이 많다고 알고 있기에 이렇게 또 말해 주었다. 아무리 교과서가 그렇게 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문학작품, 더구나 시를 쓰는 사람은 살아 있는 우리말을 써야지요. 교과서고 사전이고 그밖에 어떤 책보다도 위에 있어야 하는 것이 백성들이 쓰는 살아 있는 말 아닌가요?
내가 이렇게 말했지만 그 시인은 시원스럽게 따라주는 태도가 아니었다. 그 음악 교과서에 나오 가사가 민요 교재로 되어 있어요. 했다. 그 뒤 6학년 음악책을 구해서 보았더니 정말 끊자 로 나와 있었다. 다음은 22쪽에 나와 있는 교재를 그대로 옮긴 것이다.
[고사리 끊자]
전래동요 (한만영 채보)
고사리 대사리 끊자 나무 대사리 끊자
유자 꽁꽁 재미나 넘자 아장장장 벌이어
끊자 끊자 고사리 대사리 끊자
앞동산 고사리 끊어다가 우리 아빠 반찬하세.
이게 어찌 된 것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끊자 가 될 리 없다. 사투리도 이럴 수는 없다. 채보- 악보를 만든 사람이 어디서 잘못 들었거나, 교과서를 만드는 과정에서 잘못 적었음이 틀림 없다. 그러나, 그래도 모른다 싶어 1931년에 나온 [조선 구전 민요집](김소운편저)을 찾아 보았다. 이 책에는 고사리를 꺾는 민요가 네 편 나와 있다. 짧으니까 적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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