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대표수필 - 김동리 외 9명
"한흑구편"
한흑구(1909~1979)
수필가. 소설가. 평양 출생. 미국 템플 대학 신문학과 수료 포항 수산 대학 교수 역임. 30년대에 월간지 '대평양', 문예지 '백광'을 창간. 주재하면서 단편 소설과 평론을 활발하게 발표한 바 있으며 해방 후에는 주로 수필에 전념하여 자연의 아름다움과 시정 생활의 애틋함을 그렸다.
옥수수
아내가 거리에 나갔다가 옥수수 두 개를 사 왔다. 하나씩 먹자는 뜻이다. 그러나 옥수수 자루가 얼마나 큰지 반 토막도 다 못 먹겠다. 한뼘 반도 넘으니 양적으로 한 자나 되는 것 같다. 요사이 TV에서 전하던 개량종 수원19나 20 호인 거 같다. 그리고 멀리 강원도 산간 지방의 화전에서 온 것이라고 생각이 된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옥수수를 퍽이나 좋아했다. 키가 2미터 이상이나 자라난 옥수수밭이 길 양쪽에 서 있는 좁은 길로 혼자서 지나갈 때에는 무서운 짐승이나 뛰어나올 것 같아서 머리털이 오싹 일어서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 옥수수의 이파리들은 야자수의 이파리처럼 길게 뻗어 나무의 양쪽이 늘어져서 춤을 추는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이 좋았다. 그러나 바람이 세차게 부는 날에는 병사들이 칼을 빼들고 열을 지어서 몰려나오는 것 같은 무서움도 주었다. 키가 큰 옥수수나무들이 강한 비바람에 줄기가 휘어서 절을 하는 모양을 하였다가도 향일성이 강한 탓으로 다시 태양을 향하여 고개를 똑바로 쳐들었다.
나의 고향, 평양의 근방에는 옥수수를 전문으로 농사짓는 동리가 많았다. 대동강을 건너 동쪽에 있는 사동과 미림이 그 대표적이고, 밭이 많은 이북에서는 어느 지방을 막론하고 옥수수를 심어서 식량을 보탰다. 사동에는 내 누님이 살고 있어서 방학 때이면 으레 놀러 갔고, 그 곳의 옥수수는 좀 일찍여서 여름 방학 달인 8월이 한창이었다. 국민 학교 시절부터 나는 옥수수를 많이 먹었고, 또한 좋아했다. 옥수수의 나무는 키가 크고, 후리후리해서 멋이 있지만, 야자 이파리같이 길게 늘어진 것도 보기가 좋고, 또한 그 열매야말로 어느 열매와도 비길 수 없으리만큼 아름답고, 탐스럽고, 우아했다. 푸른 식물성 섬유의 천 조박지 같은 껍질로 싸여 있는 열매를 한 갈피 한 갈피 벗기어 가면, 마지막 속잎은 희고 깨끗한 모시 속옷과 같이 씌워져 있었다. 마지막으로 그것마저 벗기면 파릿하고 흰 수염들이 열매를 보호하는 듯이 감싸고, 품어 주고 있었다. 흰 명주실과 같은 수염들을 곱게 뜯어내면, 말할 수 없이 아름답고 순스럽고, 탐스러운 옥수수알들이 곱게 줄을 지어서, 지붕 위에 있는 기왓골같이, 가지런히 박혀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참으로 황홀할 지경으로 아름다웠다. 처녀의 빨간 입술 속에서 진주알같이 빛나는 이빨보다도 더 빛나고 자연스러웠다. 하느님의 섭리로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하나의 신기한 조각이라고 생각하였다.
탐스러운 옥수수를 쪄서 먹어 보면 아무런 자극성이 없이 담백하면서도, 달고, 고소하고, 향긋하였다. 한알 한알 따먹어도 맛이 있고, 누에 모양으로 길다랗게 뜯거나, 이빨로 마구 뜯어 씹어도 그 맛은 한없이 달고, 고소하고, 향긋하였다. 열 자루를 그냥 계속해서 뜯어 치우는 젊은이들도 있었다. 옥수수를 가공해서 먹는 방법이 많이 있으나, 그 중에서도 여름에 시원하게 먹을 수 있는 것이 옥수수묵이다. 옥수수알을 맷돌에 갈아서 된죽을 쑤고, 찬 우물물을 자배기에 채운 다음, 여러 개의 잔 구멍이 뚫린 바가지로 된죽을 찬 물 속으로 뚝뚝 흘러내려서 식히는 방법이다. 이것을 옥수수묵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올챙이같이 생겼다 해서 올챙이묵이라고도 한다. 옥수수가 많이 생산되는 미국에서는 이 담백한 옥수수를 여러 가지로 가공해서 식품으로 많이 사용한다. 옥수숫가루를 비롯해서, 설탕, 전분, 과자 등과, 튀김과 야채 기름 등 많은 종류의 식품을 가공한다. 그러고도 남는 옥수수는 소, 돼지의 가축 사료로 쓰이고, 그러고도 또 남는 것은 외국으로 수출하는 형편이다.
북한에서 남한으로 귀순한 이들의 말을 들으면, 북한에서 살고 있는 서민들은 주식으로 옥수수를 배급받아서 살아가기 마련이고, 이것도 부족하게 주어서 수수죽을 쑤어 먹는 형편이라고 한다. 아무리 옥수수가 맛이 좋다고 해도 매일같이 주식을 삼아 먹어야 하고, 그것도 부족하여서 죽을 쑤어서 먹어야 한다니, 그 어렵고 슬픈 사정은 가히 짐작할 수가 있다. 식생활 사정이 이러하다니, 간장, 고추장은 어떻게 담가 먹으며, 채소나 고기는 구경도 할 수 없을 것이 뻔한 노릇이다. 우리 속담에 '굶는 것같이 서러운 일이 없다.'고 했는데, 북한에서는 무슨 까닭으로 백성들을 굶겨야 하나. 아내가 사 갖고 온 강원도산 수원 19호의 큰 옥수수 자루를 들고, 한알 한알 뜯어서 씹으며, 옛 추억에 잠겨 본다. 야자나무 수풀과 같이 우거져 서 있던 옥수수나무들의 긴 이파리들이 너울너울 팔들을 벌리고 춤을 출 때면, 손가락을 벌린 듯이 높이 피어난 옥수수꽃의 꼭대기로 수많은 풍뎅이들이 소리를 내며 날아다녔다. 서늘한 바람과 함께 옥수수의 시원한 그늘 속에 뚫린 길을 혼자서 20리를 즐거운 마음으로 걸어다니던 어린 시절이 아름다운 풍경화와 같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그리웠던 옛 시절을 되씹는 듯이 옥수수의 반 토막을 맛이 있게 뜯어먹다가 오늘의 고향을 생각하면서 그만 내어놓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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