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대표수필 - 김동리 외 9명
"김소운편"
김소운(1907~1981)
수필가, 시인. 일본 문학가. 호는 소운. 경남 부산 출생. 일본에서 중학 중퇴. 초기에는 시로 출발하여 관념시 계통의 시작품을 발표했으나 일본인들의 근거 없는 우월감과 한국 문화에 대한 인식 부족을 통감하고서 한국의 민요, 동요, 시 등을 일본에 소개하는 작업을 벌여 크게 주목받았다. 문학의 사회자로 문화 수출의 상인으로 자처했던 그는 후기에는 인생에의 통찰이 담긴 격조 높은 수필을 많이 발표하여 많은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놓지 않았던 그 손
'가난'이 갖다 주는 프리미엄-그렇다고는 하나 가난만 하면 그 프리미엄이 절로 따라온다는 것은 아니다 서로 위하고 아끼는 애정의 불씨-그 불씨가 없고서야 어느 아내가 간장 하나로 밥을 먹으면서 '눈물이 나도록 행복'할 것이며, 어떤 사내가 아침 끼니를 삶은 고구마에 홍차 한 잔으로 때우려는 아내를 남의 앞에 치사하고 다닐 것인가. 귀하고 소중한 것은 가난 그것이 아니요, 제아무리 염라 대왕 같은 가난의 위력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시들지 않는 '진실의 애정' 그것이라는 것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가난한 내외간 이야기가 또 하나 있다.
사내는 등산을 좋아했고, 책읽기를 좋아했다. 쉬는 날은 젊은 아내를 데리고, 자그마한 륙색을 어깨에 메고는 일쑤 산을 잘 찾아다녔다. 몇 가지 일에 실패를 겪고 나서 사내는 사과 장사를 시작했다. 과일 시장에서 사과를 사들여 트럭으로 춘천까지 실어 가서 거기 장사꾼에게 넘기면 수송 운임을 제하고도 얼마만큼은 이윤이 생겼다. 제날로는 못 와도 춘천서 하룻밤을 묵고 다음날은 아내가 기다리는 서울로 돌아왔다. 남의 곁방 하나를 사글세로 빌려서 장모와 같이 사는 세 식구 살림이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은 사과를 싣고 춘천으로 떠난 뒤 사흘이 가고 나흘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었다. 기다리다못해 닷새째 되는 날 아내는 집을 나와 서울역에서 기차를 탔다. 젊은 년이 사내를 못 잊어한다고 혹시나 그런 소리를 들을 것 같아, 친정 어머니에게는 가까운 시골에 사는 동무의 병문안을 빙자했다.
"춘천에만 닿으면 자연 만나지려니 했지요. 춘천을 손바닥만하게 알았던가 봐요. 정거장에 내렸더니 읍내까지가 왜 그렇게 멉니까. 지금은 어떻게 됐는지 모릅니다마는, 그 날 밤으로 춘천에 있는 여관이란 여관은 모조리 찾아다녔지요. 그런데도 그이는 아무 여관에도 없어요. 하룻밤을 지내고 나서 이튿날 아침, 그이의 친한 분이 도청에 있다는 생각이 나서 거기를 찾아가느라고 나선 길에, 행여나 해서 정거장에를 가 보았지요."
그랬더니 차표를 사려고 줄을 지은 행렬의 맨 앞에 그 남편이 서 있었더란 것이다. 아내는 반가움, 그리움에 가슴이 뛰면서도, 입으로는 아무 말도 못하고 남편 곁으로 가서 그저 가만히 서 있었다. 두 내외의 눈이 서로 마주치기까지 얼마나 시간이 걸렸을까? 2초나 3초밖에 안 되는 그 짧은 시간이, 아내에게는 몹시도 길고 지루했을 것만 같다. 춘천시 서울까지 서너 시간이나 달리는 그 거리를 남편은 아내 손을 꼭 쥔 채 찻간에서 한 번도 그 손을 놓지 않았다. 닷새째가 되도록 남편이 돌아가니 못한 사연-춘천으로 올 때 중도에서 태워 달라는 사람들을 트럭에 올렸더니, 인원이 좀 많았던지 가마니에 넣었던 사과들이 사람 무게에 눌려서 서의 모두 껍질이 상해 버려 옳은 값으로 흥정이 되지 않았다. 밑지고 돌아갈 수는 없는 사정이라 장터에 임시로 자리 하나를 빌려 낱개로 소매를 하느라고 꼬박 나흘이 걸렸다. 아내가 기다릴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나, 그 당시는 전보도 옳게 제 구실을 못하던 시절이다.
남편이 유숙한 곳은 친구네 집이었다. 여관을 주름잡아서 필경 찾지 못했던 이유가 밝혀졌다. 그러나 그런 주석이나 해명은 지금 쓰는 이 이야기와는 별로 상관이 없다. 춘천서 서울까지 서로 말이 없이 찻간에 실려 오면서 아내의 손을 쥔 채 그 손을 놓지 않았다는 지아비. 남편에게 손 하나를 맡긴 채, 행복에 젖어 그저 황홀했던 그 날의 그 아내. 이런 행복은 어느 장관 댁이나 고루 거각의 부잣집에서는 좀처럼 못 찾아보는 행복이다. 그러나 그런 행복론보다도 생각해 보아야 할 일이 따로 있다.
간직한 행복의 실태
사과 장사에서 몇 해나 지났는지-그 새 어린것이 강보에 싸인 갓난애까지 셋이나 생겼다. 서울서 백여 리 떨어진 시골 농촌에서 돼지를 기르고 닭을 치고 하면서 영영 자립하던 그들의 단란한 가정이 하루 아침에 산산이 부서졌다. 6.25사변에 한 마을 청년 네다섯과 같이 끌려나간 채 1주일이 지나도록 남편은 돌아오지 않았다. 수소문으로 30리 밖 재 너머 언덕으로 찾아간 아내는 거기 총알에 꿰뚫려 쓰러진 송장 속에서 남편의 시체를 찾아 내었다. (이런 이야기를 들추기로 들면 한이 없다. 6.25의 피비린 희생이 어찌 이 한 가정뿐이랴. 여기서는 그가 죽었다는 사실, 두 번 다시 그들 가족 앞에 나타나지 않는다는 그 사실만을 적어 두기로 한다.)
다시는 되돌아오지 못할 막다른 외길, 그것이 '죽음'이다. 사람들은 이별을 슬퍼하고 죽음을 슬퍼한다. 과연 죽음이란, 이별이란 그렇게 슬퍼만 해야 하는 것일까? 슬픔, 눈물, 그런 불행의 저쪽에 행복이란 것이 있다. 도대체 행복이란 어떤 것이며 무엇을 가리킨 것일까? 거기에 대한 대답을 뚜렷이 내세운 사람은 아직은 없는 것 같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행복이란 객관의 눈으로는 헤아릴 수도, 잴 수도 없다는 것--제각기 제 주관 속에만 간직할 수 있는 것 그것이다. 천하가 다 내 것이면 행복할까? 전 세계의 미남 미녀를 혼자 독차지할 수 있다면 행복할까? 호화 찬란한 성찬보다도 주릴 때 먹는 보리밥 한 술-행복이란 어디까지나 내용의 문제요, 분량으로 판단할 것은 아닌 것 같다.
R씨의 초대로 저녁 대접을 받은 자리에서 R씨가 자기와는 친한 어느 부인네 한 분에게 물었다.
"부인은 지금까지 겪어 온 중에서 어떤 때가 제일 행복했나요? 가장 행복이라고 생각되던 일이 뭔가요?"
동석했던 그 부인네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어 한 말이 '서울 닿기까지 한 번도 놓지 않았던 남편의 손.' 그 이야기였다. 세 아이가 다 자라서 그 중 둘은 벌써 대학생이라고 한다. 거기까지 길러내면서 걸어 온 고생길. 어느 때는 길거리에 앉아서 떡장사도 했고, 시골을 찾아다니면서 옷가지와 양곡을 바꾸는 행상꾼 노릇이며 나중에 좀 자리가 잡힌 뒤에는 동대문 시장에 가게를 갖고 헌옷 장사를 하다가 믿었던 여자 친구에게 푼푼이 모은 돈을 떼어도 보았고-. 자식 셋에다 사는 보람을 걸고 격류를 거슬러 살아 온 그 고초 속에서도, 때로는 즐거운 일, 행복으로 느껴질 일도 전혀 없지는 않았으리라. 그런데도 한 여인의 가슴 속에 그 날 그 찻간에서 느꼈던 행복만이 오직 하나 간직한 행복의 실체였다는 사실-무슨 외국 영화의 한 토막 같은 그 날의 그 장면을 마음 속으로 새기면서 나는 또 하나 딴 생각에 잠겼다.
- 만일에 그 남편이 죽지 않고 살아 있었더라면 그 날의 그 '행복'이 과연 지금까지 자리를 바꾸지 않고 그대로 이어졌을까? 젊어서는 그런 일도 있었더니라는 한낱 낡은 앨범의 한 장으로 그쳐 버리고 말지 않았을까? 만인이 슬퍼하는 죽음-그 죽음으로 해서 경화되는 사모가 있고, 퇴색하지 않는 사랑이 있다면 '죽음'을 어찌 슬프다고만 할 것인가-. 죽음이 가져오는 손실보다는 죽지 않고 삶으로 해서 결과하는 상실이 더 크다는 것을 생각할 때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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