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대표수필 - 김동리 외 9명
"김소운편"
김소운(1907~1981)
수필가, 시인. 일본 문학가. 호는 소운. 경남 부산 출생. 일본에서 중학 중퇴. 초기에는 시로 출발하여 관념시 계통의 시작품을 발표했으나 일본인들의 근거 없는 우월감과 한국 문화에 대한 인식 부족을 통감하고서 한국의 민요, 동요, 시 등을 일본에 소개하는 작업을 벌여 크게 주목받았다. 문학의 사회자로 문화 수출의 상인으로 자처했던 그는 후기에는 인생에의 통찰이 담긴 격조 높은 수필을 많이 발표하여 많은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연잎에 괸 이슬
아쉬움이라니 바로 며칠 전에 본 영화의 장면 하나가 생각난다. 극영화는 아니고, 어느 먼 나라의 생활의 실경을 찍은 것이다. 비가 오지 않는 지방이라 물이 몹시 귀하다. 흘러가는 시내도 없고, 우물을 판다고 해서 물이 솟아나지도 않는다. 여인들은 첫새벽에 먼 길을 떠나서 연 잎사귀에 괸 이슬을 찾아 다닌다. 하얀 구슬처럼 연잎 위를 구르는 이슬 방울-그것을 하나하나 조심스럽게 그릇이 옮긴다. 생명에 바로 직결되는 의미로는 어떤 보석, 어떤 구슬보다도 더 귀하고 소중한 이슬 방울을-그것이 하나하나 모여서, 나중에는 제법 물 소리를 내면서 쏴 하고 커다란 물독에 부어진다. 아쉬움을 두고 또 하나 연상되는 것은, 30여 년 전 일본서 본 "아랑"이란 스웨덴 영화이다. 흙이라고는 한 줌이 없는-바윗돌뿐인 절해 고도-거기 젊은 어부 내외가 산다(십수 년 전에 두 번 가 본 독도가 꼭 이런 섬이었다.). 거기서도 씨를 뿌리고, 곡식이 자란다. 흙 없이 어떻게 씨가 뿌려지나? 사람의 팔 하나가 겨우 들어가는 바위 틈-그 밑바닥에 풍화 작용으로 깎여진 바윗돌의 부스러기가 깔려 있다. 한쪽 손을 뻗을 대로 뻗어서 바위 틈에서 수백 년, 수천 년 쌓였던 그 돌 부스러기를 손으로 긁어 올린다-연 잎사귀에 괸 이슬 방울을 모으는-바로 그 정성, 그 노력이다.
해초를 평범한 바위 위에 깔고, 그 위에다 긁어 올린 돌 부스러기를 덮는다. 이것이 그들의 '밭'이다. 이 '밭'에 해가 쬐고 비가 내려서, 뿌린 씨에 싹이 트고 나중에는 곡식이 맺는다. 시간의 경과를 압축한 화면만으로는, 마치 무슨 마술의 무리를 보는 것만 같다. 그러나 마술도 기적도 아닌, 이것은 인간 생활의 냉엄한 현실의 단면이다. 조상이 마련해 준 이 땅, 여기는 물도 흙도 풍성하다. '풍성'이란 말이 우스울 정도로 우리는 그런 구애를 모르고 살아 왔다. 풍화암 부스러기를 긁어 올릴 필요도 없고 연잎에 괸 아침 이슬을 모을 필요도 없다. 하물며 편편옥토, 하물며 옥수 같은 물맛, 문화, 예술의 메카라는 프랑스에도 이런 물은 없다. 그러나 '물'이니 '흙'이니를 예찬하려고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은 아니다. 마음의 주림, 메마르고 거친 생활 감정으로 따진다면, 오늘날의 우리처럼 가난한 백성도 아마 드물리라. 연 잎사귀의 이슬을 모으는-바위 틈에서 돌 부스러기를 긁어 올리는 그런 생활을 내려다보고 동정할 주제가 과연 우리에게 있다고 할 것인가? 다만 그들과 다른 것은, 우리의 아쉬움이, '흙'이 아니요, '물'이 아니라는 그것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