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석편"
이효석(1907__1942)
소설가. 호는 가산. 강원도 평창 출생. 경성 제대 법문학부 졸업. 숭실 전문 학교 교수 역임. 한국적인 자연의 아름다움을 배경으로 주옥 같은 단편 소설을 썼던 이효석은 수필에도 여러 작품을 남겼다. 간결체 문장의 전형을 볼 수 있다.
향연
일각이 천금의 값이 간다는 봄날 저녁, 거리의 향연에 감은 옛날 아가톤의 집 축하연에 모여 가는 기쁨보다 못할 것은 없다. 모이는 사람들이 반드시 희랍 시대의 철학자들일 필요는 없는 것이나, 그러나 일단 가서 모여든 면면에 접하였을 때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80여 명의 소위 거리의 지명의 사를 망라한 대연이었으니 80여 명에서 겨우 80분지 34명밖에는 구면이 없음이다. 60옹 50객 40줄 30대의 각 연대에 뻗쳤고, 종교가, 교육가, 법률가, 도규가, 조고가들이 쓸어 왔으니 희랍 시대의 초대객보다는 확실히 색채인 셈이다. 물론 그들의 지혜가 아가톤의 집에 모였던 옛 사람들에게 미치는지 못 미치는지 그들에게 비겨 자라격에나 갈는지 못 갈는지는 별문제다. 그들에 의해서 반드시 거리가 운전된다고도 할 수 없으나 그 얼굴들이 별로 신통할 것은 없는 것이요, 어떻든 이것도 저것 같고 저것도 이것 같아서 아물아물 그 수가 퍽도 많은 것이다.
도회의원도 많거니와 의사도 퍽은 많다. 인사 받은 몇 사람을 구면의 분에게 조용히 물어 볼 때 "그 사람은 상당한 지식인이오." "그 사람은 그다지 좋지 못한 사람이오." 대답하고는 좌석을 군데군데 짚어서 설명한다. "저건 돈푼이나 있죠." "저건 고리 대금 업자요." "저건 술주정꾼이오..." 잡동사니다. 오월동주이기는 하나 잔치가 되었을 때에는 준연한 식욕으로 향해서 화기 준연하게 통일되었고 술이 돌았을 때에는 운명의 배멀미에 취한 듯 흐느적거리며 당 안이 낭자하였다. 10여 명의 명기가 틈틈에 끼어서 술시중뿐만이 아니라 이야기 사중에 여념이 없다. 청초한 맑은 자태들이 점홍이 아니라 점백의 정취를 나타냈다. 사람은 항상 무슨 말들이 그렇게 많을까. 아가톤의 집 연회에서는 연애를 논의하고 사랑의 원리를 이야기들 하였다. 잔치 마당에서는 그것이 가장 격에 맞는지도 모른다.
나도 이 날 밤의 한 구석의 회화를 비역해 본다. 연애론이 아니고 치정론이라면 결국 현대인의 그만큼 고대의 희랍인보다 타락했다는 증명뿐이요 내 허물은 아닌 것이다.
"요새 까딱 안 오실 젠 신문사 일이 바쁜신 모양이죠?"
"바빠서 안 가는 줄 아나?"
"그럼 아직두 그걸 노여워하고 계시나요? 내 곡절을 얘기한다 하면서 못 했군요. 오늘 밤에는 기어이 얘기해 드리죠."
"발명은 왜, 뻔히 아는 노릇을 이제 새삼스럽게 발명할 테야?"
"세상 소문이란 대개 사실과는 다르거든요. 말이란 양편 말 다 들어야지, 왼편 말만 가지군 아나요."
"암만 그래 보지, 곧이듣나."
"그 날 밤같이 우리집까지 오셨던 건 아시죠. 얘기는 게서부터 시작되는데 선생이 가신 뒤 군이 자꾸 쉬구만 가겠다는군요. 손님 대접이라 하는 수 없이 이불을 펴 주구 전 어머니방에 가 잤죠. 그뿐이에요."
"그 군의 말과 다르거든."
"그건 그렇죠. 아침에 일어나 그 방에 갔을 때 노여노여하면서 내 겨드랑이를 들추겠지요. 변태인가 봐요. 보이는 건 그뿐이에요."
"흥 그걸루 설명이 다 됐다구 생각하나."
"그럼요. 그 이상 아무것두 없는 걸 어떡해요. 그 뒤에 다시 시골서 왔을 때엔 아침부터 허덕거리고 와선 보구 싶어 왔다는구먼요. 문제는 그 날 밤인데 여기저기 불리면서 늦도록 놀다가 좋은 사람과 같이 돌아가서 자리에 누웠죠..."
"요것 봐, 새롱새롱 말 막 한다."
"이렇게 된 바에야 막 하지 않구 어떡해요. 그래두 믿지 않으시면서. 대문 거는 것 깜빡 잊었던 것이 불찰이었죠. 별안간 문 소리와 발 소리가 나더니 주추 앞에서 부르는 목소리가 바로 그이의 목소리겠지요. 벌써 자리에 누웠구 하는 수 있어야죠. 불을 탁 끄구 시침을 떼면서 몸이 고달프니 가라구만 졸랐죠. 들어 줘야 말이죠. 이러쿵저러쿵 실랑이를 치던 끝에 기어이 마루에 뛰어올라 문을 열라는군요. 그래서 결국 터지구 말았죠. 방 안의 군이 이불을 홱 차구 일어나더니 고래 같은 소리루 누구냐구 고함을 쳤던 거죠. 그 한 마디에 밖이 별안간 조용해지구 그뿐이었어요. 생각하면 미안두 하구 부끄럽기두 하구"
"천연스럽게 말하는 품이 영웅인가 요물인가?"
"자, 이젠 오해 다 풀어 주세요... 어쩌나 사람들이 벌써 어느새 이렇게 헤졌네. 이 길루 우리집에 가시지 않겠어요? 오래간만에..."
"...글쎄 가 볼까. 요것봐. 웃긴 왜 웃어."